등록날짜 [ 2014-09-30 14:27:40 ]
성경은 하나님을 보고 나 자신을 보는 신령한 안경이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써서 영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나를 돕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서 어떤 악한 세력이 나를 둘러싸도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
이 영의 눈을 떠야 영적 무지에서 오는 시험에 들지 않는다.
신령한 안경을 써야 하는 이유
우리는 시력이 나빠지면 안경을 착용해서 시력을 보완한다.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면 사물과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신앙생활 할 때도 전지전능한 성경이라는 안경을 써서 영의 세계를 분명하게 봐야 한다.
자신이 신앙생활 잘하다가 시험에 들었다면, 성경이라는 영의 눈,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안경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라는 전지한 안경을 착용하지 않으면 영적 세계를 전혀 분별하지 못한다. 신령한 안경을 착용하여 영적 세계를 보고, 알며 사는 것이 축복이다.
시험에 든 사람은 자기 영혼이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데도 자기가 보는 눈이 바른 줄 안다. 마귀는 어두움의 주관자이기에, 마귀가 주는 안경을 쓰면 신령한 판단을 전혀 할 수 없다.
사회에서도 자기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체의 이익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자신들의 유익만 탐하느라고 자기가 먹고살아야 할 터전이 다 망할 때까지 투쟁을 벌이다가 망한 다음에야 후회한다. 하나님 앞에 ‘깨달았다, 돌이켰다’는 말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안경으로 바꿔 썼다는 말이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자신이 쓴 생각의 안경에 따라 목회자의 진실한 심정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목회자의 중심을 전혀 보지 못한 까닭이다. 성경으로 신령한 안경을 착용하지 않으면 영적인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삼손은 자기가 사랑하여 함께 살고 있는 들릴라가 위선적인 사랑을 베풀고 갖은 계교를 부리며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내려 할 때, 그것이 블레셋이 보낸 첩자의 간교한 유혹인 줄 알아볼 안경이 전혀 없었다.
만약 성령의 분별력이 있는 전지한 영의 안경을 썼더라면 그 간교한 궤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 명령대로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이 깎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힘이 빠져 두 눈이 뽑힌 채 연자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지킬 만한 신령한 안경이 없으니까 자신의 목숨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신령한 영의 눈이 보여야 시험을 이긴다
하나님 말씀 속에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복이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죄를 저질러 죽음을 자초하는가? 사느냐, 죽느냐를 볼 수 있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볼 신령한 생명의 안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다(계3:18). 즉 전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을 보라는 말이다. 사업을 할 때도 경제 흐름을 읽어 성공할 수 있듯, 신앙생활도 나를 죄짓게 하여 죽이려는 마귀역사와 살리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를 보아야 산다(엡6:12).
우리가 세상에서 육신적인 것들에 수많은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라고 하는 신령한 안경을 썼기에 영의 눈이 열려 영생과 천국과 면류관이라고 하는 영적 유익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이는 까닭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지키는 우리를 향해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다 망했다고 손가락질해도 우리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영원히 큰 영생과 천국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능히 이길 힘이 된다. 주를 위해 수고한 모든 충성이 하늘에 신령한 면류관으로 남아,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그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영광이 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에, 어떤 핍박과 환란이 와도 믿음생활을 전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신령한 안경을 써야 한다
유대교의 율법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였다. 누구보다 유대교를 맹렬히 믿는 사울은 예수 도를 좇는 사람 역시 신성 모독 죄인으로 보고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시리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사울을 불렀다. “사울아, 사울아!” 그 당시에 사울은 율법이라는 안경을 썼다. 그런데 율법의 용모대로가 아니라 사울 자신이 만든 안경을 쓴 것이 문제였다. 율법은 의로운 법이로되, 율법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순간 인간이 죄인임을 나타내는 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서 인간은 절대로 의인일 수 없다. 그런데도 사울은 율법 앞에 자신이 의인으로 보이는 잘못된 안경을 썼다. 그러니까 사울 자신이 율법으로 볼 때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못 보고 의인으로 보았다. 사울 자신의 판단인 것이다. 그 안경을 쓰고 자신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도를 좇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행9:1~2).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 공로로 죄를 사해주지 않으면 죗값으로 지옥 갈 죄인인 자신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목소리 안에 있는 안경이 착용되는 순간에 비로소 유대인들이 죄인의 괴수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보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주님이 주신 전지하신 신령한 안경을 쓴 것이다. 드디어 어둠의 세력이 씌워 준 무지의 안경이 벗기면서 악한 영에 장악당한 영의 눈이 열렸다. 율법을 보는 눈이 밝히 열려 바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라고 하는 안경을 착용하는 순간에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안경을 쓰는 순간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열리고, 자신의 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처럼 주님이 주신 전지하신 안경을 쓰지 않아서 눈이 닫히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로 말미암아 죄의 종이 될 뿐이다.
성경이라는 전지전능하신 안경을 쓰면 얼굴을 마주대하듯 주님의 심정이 정확히 보인다. 주님이 주신 전지한 안경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이 안경을 쓰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목회자의 심정을 알고, 성도 간에 서로 심정을 알아서 주님의 요구를 따라 영혼의 갈망하는 요청을 좇아 움직인다. 이를 가리켜 ‘영안이 열렸다’고 한다.
은사로 열리는 영안도 있고,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열리는 영안도 있다. 성경으로 보는 영안은 누구나 다 열릴 수 있으니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전지전능하고 신령한 성경의 안경을 쓰고 천국까지 영적으로 승리하기를 축복한다(고전2:10).
영의 안경을 쓰면 무엇이 보이는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고, 내가 보이고, 목회자의 심정이 보이고, 이웃의 멸망하는 영혼이 보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한번 설교를 통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거든 그 안경을 벗어 버리지 말라. 늘 갖고 다녀서 두 번 다시 같은 죄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같은 죄를 계속 되풀이해서 짓고 회개하는 것은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무보수전도자 성경공부는 여러분에게 이 영적 안경을 끼워주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한번 이 안경을 썼다면 벗어 버리지 말라. 죽을 때까지 성경이라는 안경을 끼고 살라.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다.
이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고, 예수님의 심정이 보이고 예수님의 생애가 보이고, 성령님의 역사가 보이고, 성령님의 심정이 보인다.
그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진실하신 사랑 앞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이 꿰뚫어져 보인다. 그 때 나의 잘못된 것, 부정된 것은 전부 다 내려놓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의 안경을 쓰고 나도 거룩한 그분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거룩한 자격을 만들어 가야한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이런 영적 안경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분은 영이시며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니, 그분의 전지전능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바로 그 안경을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우리 믿음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우리의 최고의 믿음은 들림 받는 신부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나는 신부인가? 영의 안경을 쓰고 내가 주님의 신부인 것을 확실히 봤다면 더 이상 만족할 것은 없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에 갈팡질팡하는가?
어둡기 때문이다. 우리 연세중앙교회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고, 목사와 심정이 통할만한 안경을 쓰고, 그 안경을 통해 하나님과 목사를 만나고, 이웃을 상대할 줄 아는 영의 안경을 쓴 자가 되기를 바란다.
영혼을 살리는 안경은 성경뿐
우리 교회 설교의 특징은 강단에서 세상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것은 우리를 보는 안경이 아니요, 오직 영혼을 살리는 안경은 성경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우리도 다 신령한 안경을 쓰고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보고, 또한 성령을 내 안에 모셔서, 그분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지혜와 지식,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자.
눈이 밝은 사람은 멀리 있는 미래까지 보니까 실수하지 않는다. 강단에서는 늘 설교를 통해 죄를 들춰내고, 마귀가 저지른 일을 들춰내니까 마귀역사는 어떻게든 강단을 핍박한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계속 부흥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의 눈으로 똑바로 마귀역사를 보고 분별하고, 인본주의 합리주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본주의로 목회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죄 이야기, 예수 십자가의 피의 공로 이야기, 예수 이름으로 나타나는 권세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안경의 이야기, 성령의 능력과 권세의 이야기를 강력하게 전해야 한다. 절대 성경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성경 안에 모든 것이 충만하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 이 세상 마귀역사와 인간의 역사, 영적 세계를 밝히 보는 안경이다. <계속>
*윤석전 목사의 ‘무보수전도자학교’ 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0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