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6-19 11:23:28 ]
성경을 육의 눈으로 해석… 절대 진리인 ‘성경’은 무시
한국교회 이단 사상은 1930년대 신령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는 1950년대 문선명과 박태선을 비롯해 신흥 이단 교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신천지 이만희 교주 등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0년대 신령파
-평안도 철산 김성도의 ‘새주파’(성적 타락설)
-원산 신학산 백남주, 유명화(접신)
-황해도 장연 황국주(피갈음)
■1940년대
-평양 허호빈의 복중파
-김백문의 야소교 이스라엘수도원(성적 타락)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피갈음)
■1950년대
-문선명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1954년)
-박태선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1955년)
장로교회 권사 출신으로 평북 철산에서 새주파를 이끌던 김성도(1882~1944)는 1923년 입신을 체험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새 주 모티브’를 가지고 새로운 교리를 선포했다. 1925년에 기존 교회에서 출교(黜敎)했는데, 딸의 신탁을 통해 ‘새 주’가 되어 냉수를 뿌리는 의식과 춤추며 환희를 느끼는 행위를 했다. 1933년 예수교회와 연합했고, 1935년에 성주교회를 창립했다. 1943년 해방을 예언했다가 고문을 당했고, 1944년에 사망했다.
김성도의 교리는 훗날 한국 신흥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이 아니고 사탄과 하와의 성관계다(부부생활 금지, 생식, 육식 금지 등을 가르쳤다. 이 교리는 훗날 통일교의 문선명, 정명석, 변찬린의 실낙원설의 기초가 된다).
1930~40년대 이단 교주들
백남주(1901~1949)는 함경남도 갑산 출생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1927~1930)를 졸업하고 ‘마르다 윌슨 여신학교’ 교수를 했다. 그는 원산 접신녀 유명화의 신탁을 받아 ‘예수교회’(1933)를 설립했다. 그는 예수교회를 세운 1월 3일을 성탄절로 보았는데 이는 훗날 김백문과 통일교로 이어진다.
백남주, 한승명, 박승걸은 ‘새 생명의 길’을 발표하고 성경 66권 성경만이 진리라는 고집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그는 원산 신학산을 설립하고 여신도와 ‘천국결혼스캔들’을 일으켜 ‘예수교회’에서 추방됐다. 1935년 ‘새주파’와 결합하여 성주교회를 창립하고 총독부에 등록했다. 그는 성주교회 49명에게 목사안수를 주고 혼숙과 혼음을 지시했다. 1945년 월남하여 충남 공주사범학교에 문화사로 있었다.
황국주(1909~1952)는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용정 장로교회를 다녔다. 그는 100일 기도 후 외모를 예수처럼 꾸미고 설교했다. “기도 중에 예수가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갈아 붙여 머리도, 피도, 마음도 내 전부를 예수화했다”고 주장했다. 1935년 함경남도 광해교회를 설립하고, 혼음, 목갈음, 피갈음, 영체교환 교리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정득은, 옥세현, 박월령 등에게 영향을 줬다. 그는 여인 60여 명과 함께 북간도 용정에서 출발해 함경도를 거쳐 서울까지 도보순례를 하기도 했다. 삼각산에 기도원을 설립하고 소위 ‘영체교환’을 했다.
허호빈은 평양 복중교회(1944~1950)를 이끌었다. 성주교회 평양 집회소(교인 60명)에서 허호빈은 김성도의 사진을 걸고 3개월 기도하던 중, 배에서 움직임이 생기고 주님이 나타나 ‘어머니’라고 칭호하다는 환상을 보았다. 그 후 신도들은 손을 잡고 둘러앉아 기도하며 ‘새 주님의 역사’를 외쳤다고 한다.
그가 본 내용은 ‘재림주는 남자다. 재림주의 옷을 만들고 잔치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흩어진 성주교인 300명을 모아 재림주의 옷을 만들고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두 흩어지고 자연히 없어졌다. 훗날 평양에 올라간 문선명 씨는 복중교회에서 현 부인 한학자 씨의 모친 홍순애를 만난다.
김백문(1917~1990)은 1934년 17세 때 원산신학산에서 백남주 목사를 만났고 백남주 목사를 따라 성주교회에 가입하여 김성도와도 만났다. 백남주와 김성도의 계보를 이은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에 ‘야소교 이스라엘수도원’을 세웠는데 1945년 20대 중반인 문선명이 그를 찾아온다. 문선명은 일 년 후에 평양 신령파를 찾아 월북했다. 김백문은 김성도의 경험을 체계화한 『성신신학』(1954)과 『기독교근본원리』(1958)를 출간했다. 그는 성부시대에는 할례, 성자시대에는 세례가 있었고, 20세기에는 체례(體禮, 피갈음)를 주장했다.
김성도의 인간 타락론은 김백문을 통해 체계화했고, 그것이 문선명의 통일교로 계승했다. 이런 주장의 단편들이 통일교 출신의 정명석, 변찬린 등 성서해석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1947년에 평양 신령파 출신 정득은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김백문을 찾아왔다. 그녀는 자기 피를 김 선생에게 먹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이른바 성혈전수(피갈음) 의식을 시작했다. 그 후 정득은은 삼각산 기도원을 설립했고, 문란한 혼음 관계를 통해 피갈음(영체교환) 교리를 전파했다. 그녀는 사탄과 하와의 관계를 성적 행위로 해석하고 구원을 위해 새로운 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9년경 박태선은 정득은을 통해 영체교환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9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