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7-10 10:06:28 ]
영생한다는 천년왕국(?)에는 박태선의 무덤이 있고
그의 사상을 따르는 무리는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박태선(1917~1990)은 평남 덕천에서 태어나 고아로 자랐다. 그는 일본에서 기독교를 접했고, 해방 이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 출석했으며, 창동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1955년 무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호소력 있는 부흥사가 되었다. 1955년 3월 남산부흥집회에서 그는 목사 100여 명에게 안찰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미 피갈음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1955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강조하는 천부교를 창시했고, 천년왕국을 기대하는 신도를 모아 1957년부터 소사, 덕소 등지에 신앙촌을 건립하고, 시온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을 주의 보혈을 받은 ‘동방의 의인’ 또는 ‘감람나무’로 호칭하고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종말이라고 말했다.
신앙촌 여전히 존재
이 신앙촌이 처음 생긴 것은 1957년 11월 1일 부천 소사 신앙촌을 착공하면서부터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일대 황무지 43만여 평을 개간해 주택과 공장, 학교, 상점 등을 지었다. 이때부터 신앙촌에서는 제과, 제빵, 간장, 양말, 이불, 속옷, 스테인리스, 가구, 형광등, 플라스틱, 비누, 성냥, 양초 등 제품 100여 종을 생산했다.
<사진설명> 덕소 신앙촌 생산 현장(1964년).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일대에 덕소신앙촌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62년 7월이었다. 소사 신앙촌에 있던 생산 공장들이 덕소 신앙촌으로 옮겨지고, 교인 6000여 명이 입주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소사 신앙촌에서 생산하던 것을 계속하면서 제강, 슬레이트 제조 등 새로운 산업도 진행했다. 특히 담요, 속옷 등 분야는 양질 제품을 대량 생산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후 부산 기장 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덕소 신앙촌에 있던 생산 공장 대부분을 기장 신앙촌으로 이전했다.
1970년 2월 28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에 건설한 기장 신앙촌은 당시 생산 공장 50여 곳을 만들고 교인 약 5000여 명이 입주했다. 그러나 1971년 12월 29일 이 지역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2000년 7월 1일 ‘개발제한구역 지정 및 관리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시행함에 따라, 신앙촌 내 개발제한구역 일부가 우선 해제지역으로 지정됐다.
신앙촌은 정기적으로 천부교 교인이 모여 절기 예배 집회를 하는 천부교인의 성지며, 신앙촌 주민 삶의 터전이다. 현재 흔히 신앙촌이라 하면 제3신앙촌인 기장 신앙촌을 가리킨다. 2010년 7월 현재 신앙촌에서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신앙촌상회’는 전국적으로 약 300곳이 성업 중이다. 서울에만 156곳이 넘는다. 제품 역시 간장, 참기름, 식초, 액젓, 된장, 고추장, 파스, 무릎 밴드, 허리 벨트, 속옷, 스타킹, 기초화장품, 양곡 등으로 다양하다.
물론 신앙촌상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은 대부분 신앙촌 기업체인 한일물산(주), 시온합섬(주), 시온식품(주) 등에서 생산한 것들이지만, 신앙촌 제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앙촌 상회에서만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 시온식품 <생명물 두부>와 발효 음료 <런>과 같은 제품들은 일반 매장에서도 판매하고, 롯데제과 <야채크래커>와 <롯데샌드>는 OEM 방식으로 생산해 역시 롯데제과 이름으로 일반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하나님이라더니 그도 죽어
자칭 하나님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이단의 모체가 된 박태선 씨는 신도에게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 ‘이긴 자’ 심지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사진설명> 부산 기장 신앙촌 내부 모습. 산 중턱에 박태선 씨 무덤이 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박 씨도 죽음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1907년 평북 덕천에서 태어난 박 씨는 1990년 2월 10일 지병과 노환으로 별세했다. 박 씨의 주검은 부산 기장 신앙촌(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770) 내 동산에 묻혔다. 그가 무덤에 묻혔음에도 여전히 신앙촌은 건재하며,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칭 후계자(?)들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9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