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9-05 15:49:05 ]
광적인 웃음, 떨림, 짐승 소리 등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해
은사는 말씀 중심으로 절제와 교회에 덕이 있어야 하는 것
최근에 ‘제3의 물결’‘빈야드 운동’ 혹은 ‘토론토 축복’이라고 부르는 운동들이 있다. 이들을 ‘빈야드’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국 캘리포니아 애나하임에 있는 ‘빈야드교회’를 이끄는 존 윔버(John Wimber)를 비롯해서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단체가 ‘빈야드 교회 연합’이고 이제는 교단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또 ‘토론토 축복’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존 아노트(John Arnott)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언론이 지칭한 대로 따온 것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권능주의, 성령 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 이 두 관점을 골자로 한다. 능력 전도를 주장하는 존 윔버는 권능주의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존 아노트는 감정주의 측면이 강하다.
존 윔버는 권능(혹은 능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존 윔버가 말하는 능력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이요,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병자를 치유한다든지, 귀신을 내어 쫓는다든지, 예언한다든지, 혹은 지식의 말씀이라는 은사를 사용해서 전도하는 것 등을 말한다.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
■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편향적으로 치우쳐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은사를 주신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적인 것도 있으나, 평범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또 그런 은사들은 모든 사람이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받은 사명과 필요에 따라 성령께서 나누어 주신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들, 능력, 신비한 현상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특정한 은사, 격렬한 감정의 분출 현상, 이적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성령 역사의 다른 중요한 측면(즉 말씀, 사랑의 삶,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교제, 사회에 대한 책임 있는 행위 등에 관련한 성령 역사)을 간과할 수 있다. 웬일인지 최근 윔버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윔버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매우 강조하며 열광주의에 빠져 있다.
■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 소리 등은 성경이 말하는 현상이 아니다
빈야드 운동이 사람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들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는 떨림, 쓰러짐, 거룩한 웃음 등 눈에 띄는 현상 때문이다. 또 이런 현상들을 실질적으로 이 운동의 특성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그들이 하는 집회 분위기는 그런 현상들을 암시적으로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짐승 소리는 토론토 교회 현상으로서, 존 아노트는 그런 현상들과 특히 짐승 소리를 정당화하는 성경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묘사한 요한계시록 5장 5절이라든지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는 아모스 3장 8절 등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는 억지 해석일 뿐이다. 위에 든 본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과 은유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 짐승 소리나 괴성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진설명> 빈야드 운동 창설자 존 윔버(왼쪽).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쓰러짐에 있는 것은 아니다(오른쪽).
또 은혜를 체험하고 쓰러지는 현상은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이들은 쓰러지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에스겔 1장 28절과 다니엘 8장 17절을 근거로 에스겔과 다니엘이 쓰러진 일을 든다. 그러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앞으로 엎드렸지, 빈야드처럼 은혜 받은 체험으로 뒤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에 비춰볼 때 전혀 합리화할 수 없는 현상에 속한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지거나(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마28:4) 사건 등을 열거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들은 은혜를 체험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므로 성경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진 것(행9:4), 요한이 밧모 섬에서 쓰러진 것(계1:17) 등은 주님의 직접적인 출현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거룩한 웃음’을 정당화하려고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창17:17;21:6)을 예로 들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광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다.
빈야드 운동은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한쪽으로 치우쳤고,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 소리 등을 정당화하려는 성경 해석이 올바르지 않으며, 또 예배를 무질서하게 드리는 모습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 많은 목회자가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자기 교회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시도하는 예가 많이 있다. 그런 경우 기존 신앙생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이들과 마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분별없이 이 운동을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성령님의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과 역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건전하고 덕(德)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