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7-10 10:17:44 ]
성경을 읽다 보면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문을 품는 것을 대부분 불경(不敬)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의문을 말하면 믿음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설명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만 합니다.
하지만 성경 내용에 의문을 품는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성경 내용에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있고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 말씀을 알고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믿음이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성경을 읽으면서 품는 ‘건전한 의문’은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의문을 제시하는 태도를 히브리인과 헬라인 관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히브리인은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인은 성경 내용을 보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역사를 하셨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 해답을 얻으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러이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똑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와 달리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보는 관점, 즉 헬라인 관점에서 보면, 성경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건을 ‘어떻게?’라는 생각으로 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으셨을까?’ 물론 이런 질문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관점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건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홍해 사건을 히브리인 관점으로 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을까?’ 하고 홍해를 건넌 것을 기정사실로 믿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헬라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바다를 가로질러 건널 수 있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은 분명 홍해(red-sea)가 아니라 갈대밭(reed-sea)이었을 것’이라고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답이 극명하게 다릅니다.
히브리인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지만, 헬라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을 짓고 맙니다. ‘왜?’라는 히브리인 관점으로 보면 영적인 답이 나오고, ‘어떻게?’라는 관점으로 보면 학문적, 문화적, 인간 중심적, 인본주의적인 답이 나옵니다.
성경을 히브리인 관점에서 읽으면 영적인 사람이 되지만, 헬라인 관점에서 읽으면 인간의 지성(知性) 수준에서 멈추고 맙니다. 즉 히브리인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으로 인식하지만, 헬라인 관점으로 읽으면 우주 안의 자연법칙 안에 갇힌 순리로밖에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 살던 수많은 사람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경 속 사건들을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나 신화(神話)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 수준으로 격하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신학에 젖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늘 영적인 눈을 뜨고 히브리인 관점에서 읽으려 해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9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