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2-19 16:46:52 ]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법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한 가지를 못 지키면 율법을 모두 범한 자가 되고 맙니다. 즉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약2:10). 그러니 누가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다 지키지 못하는 이상 그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저주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인간에게 저주를 준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기능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한계를 발견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2~14).
사도 바울은 율법이 죄를 찾아내는 기능 면에서는 선하지만, 죄를 찾아낸 이후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난다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인간은 영원한 저주와 멸망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율법의 한계를 잘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 앞에 끌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율법에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니, 이 여인은 꼼짝없이 모세가 정한 율법대로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 데려온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율법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면 살인하지 말라는 또 다른 율법에 걸릴 것이요, 그냥 살려 주라고 말씀하셔도 율법을 위반하게 되니 진퇴양난인 상황을 만들어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마디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무리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고,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을까요? 예수께서 “네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도 간음한 자”라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온전케 하신 율법의 기준이 그들의 양심을 움직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율법이 예수를 만나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율법이 예수를 만나는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 사함을 얻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율법에 용서를 더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냥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율법만 있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가 없다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범위를 확장하여 모든 인간이 싹 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율법의 기능을 보완하셨고, 또 죄 사함받을 길을 열어 주셔서 정죄하는 기능만 가진 율법이 인간을 살리는 선한 법이 될 수 있도록 완전케 하셨습니다.
/장항진 목사(도서출판국장)
위 글은 교회신문 <32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