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과 그 이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던 원죄에서 받은 구원은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베푸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완성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봄에 솟아나는 새싹을 생각해 보십시오. 겨우내 두꺼운 땅을 뚫고 올라온 기쁨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새싹은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구원받았을 때처럼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려면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치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때는 믿음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큰 시험을 당하여 내 신앙이 과연 진짜냐는 의심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구원받는 일보다 구원받은 후 내 믿음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그러다가 믿음에서 탈락하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의 확신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공격이 최고의 수비입니다. 바로 신앙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부지런히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달란트를 개발하는 것처럼 나를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믿음의 진보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마치 몸을 뒤로 젖히고 앉으면 마냥 편안하기만 한 안락의자 정도로 생각하여 매사에 가만히 있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해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자기 신앙을 성장시키는 일에 게으림을 피워서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 받은 자도 타락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1~12).
소망을 놓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믿음을 부지런히 성장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장의 한계는 또 어디까지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결론적으로 구원의 확신은 행동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야고보 기자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내가 받은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낮은 수준의 믿음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죽은 믿음이기에 그 속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장항진 목사(도서출판국장) 위 글은 교회신문 <41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