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분변(分辨)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12:56~57)고 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말씀합니다.
‘분변’이란 사물의 차이를 밝히는 일을 뜻하는 말로서, 분간(分揀), 분별(分別)이라는 말과 함께 쓰입니다.
그렇다면 ‘분변’과 ‘판단’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 중심의 문제입니다. 즉 사랑해서 하느냐,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미워서, 교만해서, 또는 그 사람이 계속 잘못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느냐의 차이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외적인 행동에 의해서도 ‘분변’과 ‘판단’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나서 이야기하는지, 혹은 무작정 옳고 그름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선택할 만한 다른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본인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그의 허물을 자꾸 옮기고 있지 않은지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혼을 인도하고 섬기는 이들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듣고 분변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을 상담해 주고 무어라고 답을 해 주어야 할 상황에 부닥칠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경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분변하고 권면하며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 몇 구절을 인용한다고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한다고 인식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욥이 당한 고난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를 판단하고 정죄한 친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 찾아왔을 때는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레 동안이나 그들은 그저 욥과 함께 슬퍼하며 위로했습니다.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2:12).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욥의 친구들은 위로한답시고 욥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마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처럼 욥이 당하는 고난이 죄의 대가라는 인과응보식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고난이 닥친 원인은 욥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단의 궤계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자 시기, 질투, 참소하며 욥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사단이 가한 고난이었습니다.
욥은 모진 고통 속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궤계를 몰랐던 욥은 하나님이 왜 자기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선입관으로 판단하고 정죄해 더 괴롭게 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말이 도리어 상처를 후벼 팔 때가 있는데 욥의 친구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맞게 잘 분변하여 영혼을 살릴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장항진 목사(도서출판국장) 위 글은 교회신문 <43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