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5-18 10:03:43 ]
유명 신학자 다수가 영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 설명
*글 싣는 순서
①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가졌다
② 인간에 대한 기능적 견해와 관계적 견해
무엇이 인간(a human being)을 사람(person)으로 만드는가? 언제 인간은 사람(person)이 되는가? 무엇이 사람이 되는 중요한 요소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창1:26-28)”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사람이 측량 불가능한 가치를 지녔다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진화론으로서는 설명의 한계를 인식한 서구인들 또한 이제는 동양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내재적으로 신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뉴에이지 운동과 범신론(汎神論)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모든 만물을 가로지르는 신의 현현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한편, 진리는 상대적이며 각각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무언지에 대한 답은 없다. 단지 우리는 여러 개인과 다양한 문화들은 인간에 관한 어떤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비기독교인들의 인간의 이해에 대한 사상을 접할 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특별히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왔습니다. 첫째,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존 칼빈 같은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인간의 영적 부분인 영혼(Soul)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 영혼을 우리의 사고능력과 의사소통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랑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결부시켰습니다.
둘째, 20세기에 들어 주장되는 견해로서 인간을 지구의 사랑 많은 주인으로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지구를 지배한다는 인간의 기능으로서의 관점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부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강조하며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들의 관계성과 연결시켜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형상에 대한 세 가지 이해의 관점들을 성경구절과 더불어 생각하고 각각의 관점에 반대하는 입장들도 함께 이해해보려 합니다.
① 오직 인간만이 영혼(soul)을 가졌다
인간의 형상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인간의 본질(essence)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두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영혼(soul)을 가지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혼을 통해 인간을 하나님 형상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성경말씀(창 1:26~28)의 근거가 아니라는 반대 의견의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인간의 내재적 가치로서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진실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라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히브리적 사고라기보다 헬레니즘의 사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성경 구절은 사실 이러한 형상이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성경 구절은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헬레니즘 문화가 성경보다 영향력이 있다고 증명되었다는 사실에 대부분 크리스천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영혼과의 관계를 지지하는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견해의 기초는 사실상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동물에게도 영생을 주지 않았으며 생각하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계속>
<참고도서: Across the Spectrum written by Gregory A. Boyd & Paul R. Eddy (Baker Academic, 2002)>
※편집자 주=윤대곤 목사의 평신도 신학에서는 신학의 기초적인 내용을 두루 다루고자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