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 ⑧]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인가

등록날짜 [ 2010-09-14 07:17:05 ]

술 취한 한 남자가 차를 운전하다 어린아이를 치어 죽였다. 이 아이의 부모는 크리스천 친구에게서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재하시고 모든 일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네.”

이 말을 들은 아이의 아빠는 화를 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아이 죽음의 배경이라면 그는 사랑과 선하심이 아니야. 우리 아이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거두시고 우리를 이러한 악몽 속으로 내몬 이가 하나님이라면 그는 잔인하신 분이지!”

둘째 친구는 그 말에 동의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의 배경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술 취한 운전자 혼자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네. 네가 슬픈 만큼이나 하나님도 슬퍼하고 계시지. 하나님은 단지 당신 둘을 위로하길 원하신다네."

만약 당신이 죽은 어린아이의 부모라면 두 친구에게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주재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술 취한 채  운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결정까지는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사고를 통제한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비극적 사고를 하나님의 탓이라고 돌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또 만약 하나님이 이 사고를 통제하지 않으셨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질문이다.

양립론의 대두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어느 의미에서든 세상을 통제한다는 사실에는 항상 동의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능력은 그에게서 오며,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확실히 이루어진다고 크리스천들은 고백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세상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시며 친밀하게 세상과 관계하고 마지막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 범위에 대한 여러 가지 부딪히는 생각들이 있다. 초기 신학자들은 그 당시 만연하던 운명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통제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4~5세기에 이르러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견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동등하거나 거의 같은 힘을 가진 선과 악의 신들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다는 당시 유행하던 견해(마니교)에 대한 반응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일은 한 하나님(성경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교회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발전시켜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신했다. 이러한 견해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양립하기 때문에 양립론이라고 부른다.

칼뱅과 알미니우스
현재 계속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논쟁은 16세기부터 시작했다. 프랑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누가 구원을 받고 못 받는가를 포함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통제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칼뱅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알미니우스라는 신학자는 신의 통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통제하시는 것은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는 순전히 인간의 자유라고 믿는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지 못 받을지를 미리 아시지만 그는 신자와 불신자를 통제하지 않으신다.

이후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통제를 확신하는 칼뱅주의자 편과 그렇지 않은 알미니안주의자 편 간에 항상 논쟁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 논쟁은 여전하다. 다음 편부터 섭리론 차원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08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