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9-28 21:05:16 ]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
인류의 구원과 섭리도 주님의 ‘뜻’
이번 호부터 2회에 걸쳐 섭리론 차원의 ‘칼뱅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의 주관자시며 전능한 창조자시라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말한다. 여기서 만물은 악한 것을 제외하지 않는다. 작은 차원의 것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차원의 것들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만물(all things)’은 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현대 인간주의 인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인 이슈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무한한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경배 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을 경외(敬畏)와 영감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일관하게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다 행하실 수”(시135:6) 있다고 묘사한다. 욥은 그의 참혹한 시험을 통과한 후 주께 고백한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 선지자 다니엘은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고 하였다.
주는 무엇을 계획하시든지 행하신다. 그의 계획은 폐할 수 없다(사14:24, 27). 그는 정확한 때와 나라들의 경계를 결정하신다(행17:26). 그는 날의 수와 달의 수와 그가 창조한 모든 사람의 제한을 정하신다(욥14:5; 시139:16).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1:12~13). 주사위가 던져질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떨어지게 된다(잠16:33).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나아간다(롬11:36).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들의 결정에까지 미친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을 세우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고 하지 않음에 관한 결정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잠16:9; 19:21; 20:24). 이렇게 그는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게 하신다(잠21:1).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결정은 하나님 한 분의 뜻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성경은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16:14)고 말한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전12:3).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문제다(엡2:8).
사실 하나님께서 이끈 사람들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선택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 은혜대로 하심이라”라고 송축한다. 이 은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딤후1:9). 바울은 또 “곧 창세 전에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라고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된”(엡1:11)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에게 가르쳤던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통해 얘기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모든 믿는 자는 그들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믿게 된 것이다(요15:16).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1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