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 11]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

등록날짜 [ 2010-10-26 08:39:47 ]

 ‘선택의 권리’는 인간을 향한 사랑의 극치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름을 명심해야

이번 호에서는 알미니안주의 섭리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경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서, 역사의 주권자로서 찬양한다(창1:1, 신10:14, 시135:6, 단4:34~35, 요1:3, 행17:24, 엡1:11, 골1:16~17). 그는 전능하기 때문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할 수 있다(시135:6, 욥23:13~14, 시115:3, 단4:35).

그는 그가 통제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통제한다. 그는 예정하기를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예정한다(사46:10~11, 행2:23; 4:28). 어떤 방식으로든지 만물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6). 하나님은 세상의 운명을 통제하는 전능한 주권주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세세하게 통제하지 않도록 선택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으로부터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 그를 사랑하도록 원하셔서 그의 주권적 통제 영역을 제한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그를 따를 것인지 아닐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성경 속에서 늘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수24:15, 렘7:1~15;17:9~17;22:1~5, 롬10:13).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신약까지 이르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하는 능력과 의무를 주신 것을 볼 수 있다(창2:16~17, 요3:16~18).

예를 들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것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기” 때문이다(왕상11:6,9). 만약 하나님 자신이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킨 원인이라면 이 구절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드기야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한” 것은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대하36:12~13). 시드기야가 악을 행했는지에 관한 설명은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에 종종 실망하시고 낙담하신다. 노아의 홍수에 앞서 인간이 빠졌던 부도덕한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히 슬퍼하셨다(창6: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반발에 슬퍼하셨다(사63:10, 히3:8,15;4:7). 하나님은 자주 슬퍼하셨고 때때로 그에게 저항하면서 얼마나 사람들의 목이 뻣뻣한가에 깜짝 놀라셨다(출33:3,5;34:9, 신9:6,13;10:16; 31:27, 삿2:19, 왕하17:14, 대하30:8;36:13, 느9:16, 사46:12;48:4, 호4:16). 불성실한 아내의 남편처럼 자기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가슴은 찢어진다(호11장). 분명히 사람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거절할 수도 있다(눅7:30).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완전히 통제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저항하지도 않고, 슬프게 만들지도 않고, 좌절하게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겔18:32, 벧후3: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선택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애3:33). 오히려 그는 죄인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사30:18)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간청하신다(사65:2, 겔18:30~32;33:11, 호11:7, 롬10:21).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주를 거절하고 지옥으로 간다. 확실히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을 그들 자신이 선택한다(요3:18~19).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슬프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제하는 쪽보다 사람들이 멸망치 않는 확신을 주는 쪽으로 가능성을 열어 두셨다.

위 글은 교회신문 <2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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