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1-08 21:44:43 ]
연호와 친구는 기독론에 관한 토의를 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자기가 신이라고 했던 사람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거야?” 격양된 어조로 친구가 물었다. “예수님은 무어라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연호는 영적 위기에 부딪힌 친구를 돕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호는 그 친구에게 얘기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어.” 성경이 말하길 우리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 친구는 성경에 단지 말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인간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아. 하지만 너희 기독교인은 그가 하나님이었다고도 믿잖아. 일단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일 수 있는지 모르겠고 또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가 우리가 따라야 할 분으로서 우리를 섬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우리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장점이 있다는 것 아니야?”
잠시 연호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침내 성경의 여러 구절이 떠올랐고 연호는 대답했다. “아니! 하나님이라고 그에게 모든 능력이 허락된 것은 아니야! 그랬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는 우리가 시험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셨어!” 그 친구는 이러한 대답에 더욱 격양된 목소리로 더 강한 질문을 퍼부었다. “뭐?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똑같지 않다고? 그럼 넌 예수님이 죄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얘기네?” 연호는 할 말을 잃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그가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시험당할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연호는 그 친구에게 기독교의 믿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것들이 헛수고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문제의 핵심과 차이
연호와 친구 사이 대화의 바탕을 이루는 신학적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조화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 내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기독교인은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고 또한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이러한 교리적 믿음을 451년 칼케돈공회에서 공식화하였고 기독교인들의 핵심 믿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처음이며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단의 신념들과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견해를 아리우스주의 라고 부르며 여호와 증인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통적 그룹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지지되고 있다. 또 기독교 견해는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선지자 중 하나라고 믿는 모슬렘이나 다른 그룹들과 또한 차이를 나타낸다. 게다가 예수님을 단지 내재한 신이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으로서 보고 있는 다양한 뉴에이지 운동의 견해와도 대조를 이룬다. 더욱이 예수는 단지 냉소적인 철학자이거나 종교적 사회적 혁명자이며 이를 신약 기자들이 신화화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학자들의 견해와도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하게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또한 완전한 인간이라고 가르친다(요한복음 1:1, 20:28, 로마서 9:5,골로새서 2:9, 디도서 2:11~13).
그러나 어떻게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모든 사람이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복음주의 그룹들 안에서도 논쟁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은 그의 신적 특성과 인간적 특성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고 얘기하는 좀 더 전통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한다. 예를 들면 전통주의적 견해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고 동시에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케노시안 기독론이라고 불리는 견해를 따른다. 이 그룹들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비웠다 또는 내려놓았다(그리스어 kenossis=영어 empty)”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제2위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의 전지함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며 동시에 전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앞에서 나온 연호와 그 친구 사이의 질문에 관한 해답은 어떻게 이러한 신학적 질문에 답하는가에 달렸다.
다음호에는 예수의 본성에 전통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글과 케노시안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1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