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 <15>] 구원에서 인간의 의지는 어디까지일까

등록날짜 [ 2010-12-22 13:30:41 ]

들어가며
성경을 읽을 때, 특히 바울 서신을 읽을 때, 우리는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려고 노력한 바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서에 나타난 표현들을 매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지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서 9장에 이를 때,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좀 더 명확히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에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구원받을 자들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2:4).

문제의 중심과 대립
구원 문제를 다룰 때에 복음주의 기독교인 대부분이 동의하는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는 구원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확신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닌,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어떠한 이의(異意) 없이 확신한다. 성경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고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권적 창조자시며,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원자로 고백한다. 오직 예수의 희생적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구원에 관한 이러한 핵심적 교리들에 관해서는 많은 동의가 있지만, 교리적 세부사항이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는지에 관해서는 폭넓은 의견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들은 예정과 선택의 개념이 구원에 관한 성경 가르침의 중심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을 성경에서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가르치기 때문이다(롬8~9장; 엡1장). 그러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무슨 기준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예정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다양한 의견이 이 시대의 새로운 논쟁거리는 아니다. 구원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은 교회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논의되었다. 몇 가지 좀 더 직접적인 질문들을 보자.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사랑 간의 올바른 균형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 은혜는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는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가? 과연 인간의 자유는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다른 정통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모든 복음주의자는 이러한 질문과 문제에 대하여 적어도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펠라기우스는 5세기에 로마에서 추종세력을 얻은 수도승으로, 기독교인의 삶에서 도덕적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열망은 고귀했을지라도 그가 강조점을 표현하기 위해 발전시킨 신학은 문제가 되었다. 그는 아담의 죄가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도 긍정적인 나머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강조하지 않았다. 모든 복음주의자는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생각에 일관성 있게 한 목소리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관련한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구원관의 두 가지 관점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계속해 온 특별한 관점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관점은 5세기 유명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뿌리를 두고 로마서에 대한 칼뱅 자신의 해석에 바탕을 둔 칼뱅주의 관점이다. 이러한 견해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주권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죄악 된 인간들 중에서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숫자의 사람들을 예정하셨다는 확신이 있다.

둘째 관점은 17세기 신학자 제이콥 알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알미니안주의라고 알려진 관점이다. 5세기에 구원과 은혜의 작용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도전한 존 카시안이라는 수도승이 있었다. 이 수도승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리기안주의의 오류에 도전한 것은 옳았지만, 구원 과정에서 인간 자유의지의 역할을 부정하는 입장은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미니안 관점의 중요한 확신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인간에게 오지만, 이러한 은혜는 또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거절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고 구원은 예정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2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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