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36>] 값없이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등록날짜 [ 2011-11-29 13:47:40 ]

이번 호에서도 지난 호에 이어 도덕적 통치 견해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은 믿음의 회개를 하는 죄인을 기꺼이 용서하신다. 이런 내용은 구약 성경 전체가 증명하고 선포하며(대하7:14) 신약 성경에서는 이를 더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막1:15;행2:37~38;롬2:4~8). 중요한 것은 이런 주제가 예수께서 하신 비유 중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탕자 비유다(눅15:11~32). 아들 한 명이 뻔뻔하게도 아버지 생전에 자신의 분깃을 요구한다. 사실 이런 요구를 하는 탕자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난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것이다. 그는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돈을 다 써버린다(13절). 기근이 그 땅을 덮쳤을 때 당시 유대인에게 가장 불경한 일 중 하나인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고(15~16절), 기아에 시달리다가 ‘아버지 집의 종이라도 되겠다’며 집을 향한다(16~17절).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신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0~24절).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죄인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다. ‘상거가 먼데’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시 아들의 위치로 회복시키신다. 아들은 그동안 낭비한 엄청난 유산을 보상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그냥 거저 용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또 다른 비유 역시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묻자 예수께서는 사실상 제한 없이 용서하라고 말한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18:23~27).

용서의 본질은 간단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빚을 없애는 것이다. 왕이 그 종을 용서하였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 왕이 그를 불쌍히 여긴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신다. 하나님은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반대로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겔33:11). 그들이 그렇게 돌아서기만 한다면 주님은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겔33:16)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이 요구하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그분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수단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셨다.

성경이 도덕적 통치 견해를 지지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런 피의 희생과 제사는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죗값은 사망’(롬6:23)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에 쓰인 제물들은 ‘온 세상 죄를 위해’(요일2:2)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 궁극적인 희생을 예표(豫表)했다.

이렇게 구약의 희생이 성취한 것보다 더욱 초월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 죄인으로 하여금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히9:14).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한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보게 된다.

속죄에 대한 도덕적 견해를 보여주는 성경의 또 다른 가르침은, 자신이 지은 죄는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에스겔은 이렇게 말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

이런 관점은 사람들 대부분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받을 수 없다. 아무리 영웅적인 노력을 할지라도 죄속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께서 문자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속죄에 대한 도덕적 견해와 일치하는 마지막 가르침은, 믿는 자들을 위한 심판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신약의 가르침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롬14:10)고 기록했다. 믿는 자들의 공력을 시험할 불이 있을 것이다(고전3:12~1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여러 가르침이 주인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종들이 받을 심판을 말한다(눅12:45~48;16:1~13;19:11~27).

믿는 자들의 모든 죗값이 이미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지급되었다면 어떻게 이런 심판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믿을 때만이 그 대속의 은혜를 소유할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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