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의 숨결 느낀 터키 성지순례

등록날짜 [ 2008-07-15 10:32:45 ]

‘기독교는 말씀의 진리 위에 세운 생명 신앙’ 교훈 얻어


나는 여행을 퍽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곳이 어디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으로 나의 삶을 신선하게 해준다. 더욱이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내 생애 중 손꼽을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연세중앙침례교회가 후원하여 작년에 이스라엘을 필두로 시작된 성지순례가 올해에는 터키로 이어졌다. 작년에 있었던 성지순례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또다시 두 번째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어서 또 다른 감격과 감동이 크게 기대되었기에 여행 수개월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드디어 성지 순례의 길에 올랐다.
특히나 이번 순례지는 시대적으로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커버하는 것이었고, 지리적으로는 터키 동쪽 끝으로부터 시작하여 터키 서쪽 끝까지 훑어가는 여행이었다. 또한 성지를 수없이 다닌 바 있는 윤석전 목사님이 그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과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여행이었다. 그리고 24명의 신학교 교수들이 신약학과 구약학, 역사와 실천신학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교수들의 다양한 견해를 들으면서 행하는 성지순례야말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우리의 터키 성지순례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이루어졌다. 첫째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구약의 성지순례였고, 둘째는 사도들의 행적으로 이루어진 신약의 성지순례였다.






구약의 성지속으로
구약의 성지순례는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곳으로 알려진 아라랏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세기의 기록에서만 읽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방주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대(大) 아라랏산 옆의 소(小) 아라랏으로 알려진 산 중턱에 방주 모습의 지형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곳을 각종 장비로 탐사한 탐사대의 보고서를 검토한 터키 정부는 그곳을 방주가 머문 곳으로 공식 확인하고 ‘노아 방주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박물관에는 그곳을 탐사한 내용들이 나름대로 다양하게 증거물로 전시되어 있었고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라도 영원히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에 숨겨진 순교자의 성지
노아 방주를 본 우리 일행은 완(Van)이라는 동부 끝에 위치한 도시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바다같이 넓은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악다말 교회당을 둘러보았고 이어서 아브라함의 고향을 향했다. 그러나 예정에는 없었지만 도중에 3시간을 벗어난 곳에 바돌로매(나다나엘)가 순교한 곳에 그의 기념교회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란과의 국경으로부터 불과 1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알할밧(Alhalbat)이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그 마을은 불과 100여 채의 가옥들 남짓한 오지의 작은 마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군부대가 있었고 그 군부대 안에 절반 이상 파괴된 바돌로매 기념 예배당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우리는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그 부대장이 우리를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줌으로써 수십 년간 그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부대 안으로 들어가 교회당을 살펴볼 수 있었다.
작년 성지순례 때도 팔레스타인이 점령하고 있는 세겜에 윤 목사님의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일과,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헬몬산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기적을 다시 떠올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바돌로매 교회당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과 함께 큰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옛날 이 멀고 먼 오지까지 복음을 전하러 온 바돌로매의 열정과, 이름 없이 순교의 잔을 마신 그의 헌신이 온 몸과 마음을 찌르는 듯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후에 그의 이름을 기리고 기념교회를 세웠건만 지진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잔해를 보면서 하나님의 종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며 단순히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교훈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바돌로매 교회당을 다녀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다음 도시인 디알밧클(diyalbatkir)에 밤 12시 가까이가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급하게 하룻밤을 묵은 뒤 우리는 지금은 모슬렘의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당을 둘러보았다.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과거 수리안 기독교도들이 세운 그 큰 교회당이 이제는 회교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던 건물이 이교도의 사원으로 전락해 버린 사실 앞에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하란에서 만나는 창세기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산르우르파(Sanliurfa)라는 고도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옛날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을 둘러본 것은 이번 여행에서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비옥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을 훌쩍 떠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하란 땅. 참으로 감회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우물, 곧 후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종살이하면서 양떼와 소떼들에게 물을 길어 먹이던 그 우물을 보면서 창세기의 장면들을 상상 속에 펼쳐볼 수 있었다.





신약의 성지속으로
형편없이 말라버린 도랑 같은 티그리스 강을 바라보며 성경의 예언을 떠올려 보았고, 터키 정부가 야심작으로 만든 유프라테스 강의 거대한 댐에서 점차 다가올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된 여러 나라 간의 갈등이 몰고 올 우려되는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5~6시간 또는 9~10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다음에 만나게 될 성지에서 얻게 될 감동과 영감에 대한 기대는 장시간의 버스 여행이 문제 될 수 없었다.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 안디옥
신약의 성지로 들어가는 첫 관문은 수리아 안디옥이었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것이 시라아에 있는 줄 알았었는데 의외로 안디옥이 터키 영토에 속한 것을 보고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 바울을 통해 세계로 전파되어나가는 전초기지역할을 했던 안디옥. 성경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그 안디옥으로 간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안디옥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실루기아 항구로 찾아갔다. 그곳은 별로 유명한 관광지도 인기 있는 성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마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위해 배에 올랐을 것으로 믿어지는 옛 항구 자리에 섰을 때 온몸이 전율하는 감격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여러 증거물이 널려져 있지는 않았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배를 타고 선교여행을 시작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계를 변화시키는 시작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의 고향 다소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생애와 사역을 더듬는 성지들을 차례로 순례하기 시작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바울의 고향 다소였다. 그곳에는 그의 생가와 그의 집에 있던 우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이 우물을 길어 먹었을 것이며 이 건물에서 잠을 자고 성장했을 것을 생각할 때 그곳은 마치 선교의 거성을 탄생시킨 거룩한 산실(産室) 같았다. 그러나 그를 자라나게 한 다소를 보는 우리 일행의 마음은 단순히 감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거룩한 도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갑바도기아의 지하 동굴 교회
다소를 거쳐 우리가 찾아 간 곳은 갑바도기아의 지하 도시들이었다. 특히 우리가 집중적으로 돌아본 곳은 데림구유라는 곳이었는데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러한 곳에 피해 들어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한 초대 및 초기기독교도들의 신실한 믿음이 왠지 그곳을 찾은 우리에게 큰 채찍처럼 느껴졌다. 목숨 걸고 믿음을 지킨 그들에 비해 너무도 나태하고 안일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를 비교할 때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하 동굴에는 교회는 물론이고 침례탕을 구비한 신학교도 있었다. 침례탕을 가진 신학교이기에 데림구유침례신학교가 분명했다. 이러한 초대교회 성지를 돌아보는 사람들이라면 세례가 아니라 침례가 복음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의식임을 부인할 길이 없음이 분명해 보였다.

세속화를 거부한 괴레메 수도원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로 선포된 이후 수도사들이 산속과 바위틈을 찾아 구멍을 파고 수도원을 만들어 영성을 위한 노력을 경주한 지역들을 돌아보는 것은 또 다른 은혜와 감동이었다. 괴레메로 알려진 특이한 지형의 지역에 수백 개의 바위 굴 교회당을 만들어 영성훈련에 전념했던 초기기독교도들의 노력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세속화되어가던 당시의 기독교를 거부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곳을 찾는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의 메시지가 되어 우리를 꾸짖는 것 같았다. 확실히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았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속절없이 세속화되어가는 상황 때문이리라.

사도들이 교회를 세웠던 고대도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에베소 등과 같은 고대 도시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와 화려함을 짐작케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함이나 화려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무너져내린 돌더미와 흙 무덤만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인간이 이룬 거대한 업적은 결국 폐허밖에 남긴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들을 찾아간 사도들과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을 위한 열정은 그 모든 도시들의 화려함과 거대함보다 더 압도적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빌라델피아, 사데, 서머나, 두아디라 등은 분명 그 도시들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교회들이 세워졌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우리가 그곳들을 찾아갔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밧모섬. 사도 요한이 유배당한 그곳. 그곳에서까지 자신이 돌보던 교회들을 생각하며 기도했던 사도 요한의 충정과 사랑. 그것들은 에게해 푸른 물결 속에 선명하게 포말로 남아있었다.

신앙화석화 경고하는 소피아성당
마지막 날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 건물이 더 이상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이 되어버린 사실을 확인하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화석화가 되거나 교회를 박물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뼈저린 교훈이 그 건물 곳곳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음은 나만의 과장된 생각이 아닌 동행한 교수들의 공통인식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신앙이지 죽은 신앙이 아니다. 터키 성지순례를 통해 아마도 이 메시지는 내 평생동안 마음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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