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추석

등록날짜 [ 2008-09-12 10:45:54 ]


추석은 국가가 거국적으로 지켜왔는데 이는 이때가 가장 기후가 좋고, 가난한 사람도 햇곡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명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명절에 성도가 해야 할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온 가족과 함께 드려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7절을 통해 ‘비를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기후를 주신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기에 농사를 지어 햇곡식을 먹으며 햇과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추석은 오히려 당연히 감사받아야 할 하나님은 뒤로 한 채 인격없는 자연과 조상을 기린다는 이유로 제사라는 우상숭배가 행해지고 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추석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추석의 유래와 기원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의 유래는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부터 전국 여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음력 7월 보름부터 1달간 집집마다 돌아가며 한자리에 모여앉아 ‘길쌈내기’를 하여 진편이 음식을 대접 했다는 풍습에서 시작 됐다는 기록이 있다.
살펴보면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는 동맹, 동예는 무천이라 불리어 진 것으로 봐, 아마 그 유래는 신라 이전 부족국가 때로 거슬러 올라감을 짐작할 수 있다. 농경민족의 안녕을 하늘에 빌고 조상에 가을걷이의 기쁨을 알리는 추수감사제전으로서 추석을 한가위, 중추, 중추절, 가배, 가배절, 가위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날에는 상쾌한 해질녘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늘도 행복하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한다든가, 부모에게, 형제자매에게, 부부가 서로에게, 자녀에게 오늘도 함께 지내게 함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든가, 타향에서 뿔뿔이 헤어져 살던 가족이 다 모였음에 감사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감사를 인격이 없는 자연과 조상숭배라는 미명아래 이뤄지는 우상숭배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음이 문제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인격이 없는 자연에 복을 빌며, 죽은 조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제사라는 우상숭배가 이뤄졌던 것이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진정한 효를
명절이 되면 우리는 언제나 천리길을 마다않고 교통대란을 겪으며 고단한 몸으로 귀향한다.
이는 사실 명절이라는 계기로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고향에 묻히신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드림으로 불효를 면하고 위안을 삼고 싶어하는 효심에서 출발된 행위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죽은 부모에게 효하기 위한 수고를 하기에 앞서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성경 말씀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고 했으니, 살아계신 부모에게 보다 더 초점을 맞춰 효를 행하는 것이 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부모보다는 죽은 조상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는 것이 오늘날 명절의 현실이다.
한 잔의 물에 감사하고, 한 사발의 밥에 감사하고, 추석빔에 감사하고, 주변의 생활을 쾌적하게 해주는 모든 것에 일일이 감사하며, 진정한 명절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좋은 풍습이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감사의 대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다스리시며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이를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살아계신 부모에게 천국의 소망을 함께 기뻐하며 이를 전해주는 진정한 효를 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추석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닐까.

위 글은 교회신문 <14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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