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타고 2천년 전 선교현장을 찾아가다

등록날짜 [ 2008-11-11 10:13:06 ]

이 시대 기독인도 순교의 피 흘릴 구령 열정 넘치길 기도해


성지순례 역사에 길이 남을 CBS 크루즈 제1차 성지순례가 약 2주간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7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 것도 그렇거니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밟았던 소아시아의 각 섬을 크루즈를 타고 순례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일이다. 특히 700여 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드린 주일예배는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 한복판에서 성령님이 한국교회 성도들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뜻 깊은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엄청난 핍박과 박해 그리고 각종 난제와 맞닥뜨리면서도 오직 예수를 전하게 하심과 같이, 오늘 이 시대에도 환경과 여건을 초월하여 오직 예수만이 증거되길 열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성지순례에 참여한 당신의 종들과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게 하셨다. ‘바울 사도가 가졌던 구령의 열정이 나에겐 있는가?’, ‘ 바울 사도가 겪었던 핍박과 박해, 모진 고난과 고통을 겪는다 해도 복음을 전하겠는가?’
성령님은 사도 바울의 선교행적지를 밟는 성지순례팀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중요한 시간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절로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하셨다.
“주님! 사도 바울이 가졌던 구령의 열정을 나도 갖게 하옵소서!"






인천공항에서 목적지를 향해

10월 30일(목) 오후 2시 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을 거쳐 목적지인 요르단 암만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새벽 1시(한국시각 오전 9시).
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이용하여 숙소로 이동하는 도로엔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흑암 세력에 완전히 장악된 요르단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요르단은 현재 모슬렘 국가이지만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나라다. 왜냐하면, 성경의 중요한 사건들이 숨 쉬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침례 터라든가, 침례 요한이 투옥당했던 동굴감옥과, 목이 잘려 순교 당한 순교장소 그리고 에돔왕국이 존재했던 페트라 등이 그러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이번 CBS 크루즈 성지순례의 총책임을 맡은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의 인도로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윤 목사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현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진 현장입니다. 그 현장을 보면서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후손들에게 남길 유산이며 내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간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소유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르단 - 마다바, 느보산, 마케루스, 아르논 골짜기

성지순례팀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기독교 최초의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한 마다바 지역.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지도는 예루살렘 지역을 모자이크로 지도화한 성화로서 성서 지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한다. 이런 성화는 주로 동방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서방교회인 로마가톨릭은 성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동방교회는 성화를, 로마가톨릭은 성상을 남겼던 것이다. 문제는 성화와 성상은 있지만 예수의 생명은 없다는 것.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화와 성상이 아니라 예수 생명이 아니겠는가. 왜 오직 예수, 오직 성령이어야 하는지를 이곳에서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느보산은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근방까지 이르러 가나안을 바라다보면서 인생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곳이다. 가나안 땅을 그토록 밟길 원했던 모세,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신의 열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느보산에 오르니 모세의 안타까워했던 그때의 심령과,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모세의 중심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하였다.
마케루스 요새는 헤롯왕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궁전이요 요새지만 침례 요한이 순교를 당한 장소로 더 유명하다. 이 마케루스 요새가 세워진 산 중턱엔 침례 요한이 투옥당했던 동굴감옥이 있다. 원래 물을 저장하는 곳이었지만 감옥으로 사용된 이곳에 침례 요한이 투옥되었다가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로 인해 마케루스 요새에서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평생을 광야에서 지낸 침례 요한은 마지막 생도 광야에서 마감하게 된다. 주님은 이런 침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마케루스 요새 위에 서니 한 줄기 바람이 휘몰아 스쳐 지나갔다. 2천 년 전 참수를 당하던 침례 요한도 이 바람을 맞지 않았을까. 그 바람 사이로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복 있도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여, 하늘의 상이 크도다." 아르논 골짜기는 모압과 암몬의 경계지역이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관계를 맺고 태어난 자식들이 세운 나라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새벽 4시 15분경, 모스크 사원에서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소리가 고요하던 새벽의 정적을 깨운다. 온 나라가 매일 다섯 번씩 이 소리로 요란하다. 듣기 싫어도 저 소릴 매일 들어야만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 이미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지라도 예수를 믿는다면 저들의 인생이 달라질 텐데. 하지만 지금껏 성지가 저들의 땅에 존재함에도 아무런 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요 소경인 저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요 축복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이 성지순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은혜가 아닐까.


비아돌로로사,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밟다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알렌비 국경은 검색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테러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니 마음 한편에서 안타까움이 솟구쳐 오른다. 왜냐하면, ‘샬롬(평강)'을 인사로 주고받는 저들이지만 실상은 샬롬이 없는 나라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가 없으면 결코 샬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이스라엘은 지금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저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토록 메시아를 기다렸던 저들이건만 정작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유대인들. 무엇 때문인가.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가 아닌가.
통곡의 벽에 서서 온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토라(율법)를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그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저들의 인생, 결국 헛된 수고만 할 뿐이라는 것을. 그렇다. 예수 생명이 없는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인생일 뿐이라는 것을 성령님은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곳에 여전히 머무는 듯하다. 여전히 지금도 생명이 없는 이 땅을 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것 같고 여전히 생명이 없는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듯하다.
생명이 없으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저 유대인들.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인 한국인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의 예배를 올려 드렸다. 성령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이 유럽을 거쳐 마침내 한국 땅에 상륙, 한국인의 심령에 예수 생명을 넣어 주셨고 그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라고 생명 없는 예루살렘을 보게 하신다.
그래서인가 700여 명의 한국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엔 뜨거운 감격이 있었고 통성기도엔 절절한 가슴이 배어 나왔다. 그 찬양과 기도가 어우러진 예배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의 가슴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대 사건이 되었으리라. 정말이지 한국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또 하나의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음성이 가슴을 때린다. “내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울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동일하게 울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으셨던 비아돌로로사. 일명 십자가의 길을 밟았다. 누구를 위한 고난의 걸음이셨던가. 바로 나를 위한 걸음이 아니셨던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걸음이 아니었던가.
진정 내 안에 십자가로 인한 감격이 있는가. 진정 내 안에 나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감사가 있는가. 진정 내 안에 예수님처럼 영혼을 살려야겠다는 구령의 열정이 있는가.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선교행적지를 찾아서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감격과 내 영혼을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감사, 그리고 영혼을 살려야겠다는 구령의 열정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성령님은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저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저들이 걸었던 길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비아돌로로사와 동일한 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걸어야 할 그 길 또한 비아돌로로사여야 한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일깨우신다. 그런데 이 길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길이라 한다. 그러므로 성령님에게 붙잡히지 않고선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이라 하겠다. 기도 없이 걸어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하이파 항구에 도착, 크루즈에 승선하여 짐을 풀고 한숨 자고 나니 어느새 배는 바나바의 고향이요 사도 바울의 제1차 선교지인 구브로(키프로스) 섬에 도착했다. 바울은 이곳 구브로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당시 6만여 명이나 살았던 유대인들의 폭동과 소요로 인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게 된다. 구브로에 가면 바울이 매를 맞았던 자리로 추정되는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런 핍박 속에서도 바울은 다시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함께 갔던 마가 요한이 그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는 것도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다시 내륙지방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륙지방은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고지대여서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못될 뿐 아니라 중간에 강도를 만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 요한은 그만 중도에 하차하고 말았다. 그것이 마가 요한에겐 한계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안 그래도 매우 힘든 상황인데 함께 가던 사람마저 중도에 하차함에 따라 팀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결코 전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가. 나를 구원해 주신 주 예수를 전해야겠다는 구령의 열정이 바울의 심령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 구령의 열정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했다. 성령님이 바울을 사용하신 것이다.
크루즈는 구브로를 지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상경 중에 들렀던 곳으로 알려진 로도 섬과 사도 요한이 유배당했던 밧모 섬에 성지순례팀을 옮겨주었다.
밧모 섬은 에게 해에 산재해 있는 3천여 섬 가운데 하나로 터키의 서해안 쿠사다 시에서 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밧모 섬은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 정치, 종교의 중범자들의 유배처였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 와서 18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96년 에베소로 귀향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는 계시 동굴이 있으며 지금은 그 위에 작은 교회당이 세워져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요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실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요한. 그래서인가 사도 요한은 사랑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던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님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사건을 보이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곧 계시록이 그것이다.
밧모 섬에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에베소였다. 에베소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와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으며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진 에베소교회가 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말씀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에베소교회는 촛대를 빼앗기고 만다.
처음 사랑이 뭔가. 처음 사랑이란, 영혼 구원의 열정을 말한다. 바울 사도나 사도 요한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한결같이 영혼 구원의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 구령의 열정이 주님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걷게 했으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수많은 핍박과 박해 등을 견디고 이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 동일한 메시지를 보내신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에베소교회와 같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개인도 마찬가지다.
조은철 목사(부평중앙충은교회)는 에베소기념교회에서 행한 짧은 메시지를 통해 “영혼 구원의 열정이 식어지면 촛대는 옮겨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이 영혼 구원의 열정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한 영혼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구령의 열정, 이 열정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비아돌로로사, 즉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령님은 성지순례에 참여한 당신의 종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셨다.






성령님은 이번 크루즈 성지순례를 통해 성지에서뿐만 아니라 크루즈 선상에서 매일 열린 윤석전 목사의 부흥집회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이 구령의 열정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육체의 기간을 내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으라 하셨다. 동시에 만약 우리에게서 이 구령의 열정이 사라진다면 한국 교회도 생명이 없는 저 성지들처럼 단지 하나의 관광장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신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여, 나에게도 사도 바울이 가졌던 영혼 구원의 열정을 갖게 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14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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