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9-07 10:48:12 ]
이슬람 세력 몰아내려다 오히려 내분 일어나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현재까지 분열
1095년 어느 날, 서방교회 로마 주교 교황 우르반(Urban) 2세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 중 한 편을 선포했다.
“동방교회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클레르몽 어느 들판에서 소리 높여 외쳤다.
“이슬람교도와 아랍인에게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으로 상스러운 종족을 그 땅에서 몰아냅시다!”
교황 우르반 2세는 군중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군중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합창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와 무지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깡패와 농민 모두 옷감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서 겉옷에 달았다. 그들의 원정은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의미와 이교도와 전면전을 치르는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동방제국 콘스탄티노플에서 집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제 막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십자군 병사 중 유독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은둔자 피터(Peter the Hermit)’가 그 냄새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수도사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목욕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와 싸우려고 9개월 동안 농민 약 2만 명을 끌어 모았다.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동방제국으로 건너간 피터의 농민들은 2개월간 콘스탄티노플 민가를 약탈한 뒤 이슬람교도가 매복한 곳으로 곧장 돌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쟁 물자를 확보하려고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던 피터를 뺀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은둔자 피터는 유럽 왕자들과 귀족들이 이끄는 다른 군대에 들어갔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이슬람군대를 격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이슬람교도의 피가 강처럼 예루살렘 거리에 흘렀다. 십자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고,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들까지 벽에 던져버렸다. 그들은 회당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있던 유대인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한 이 무차별 학살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지금까지도 크리스천을 신뢰하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에 다시 빼앗겼고, 이후 계속되는 원정에서 재차 성지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4차 원정에서는 본래 목적과 다르게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1198년 즉위한 로마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을 고무한 이였다. 그러나 그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분열하게 만든 만행을 선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노센트 3세는 이집트에 있는 이슬람군 근거지를 파괴하려 했다. 베니스 상인들은 은화 8만 4천 냥을 받고 십자군에게 배를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1202년 여름, 마침내 십자군이 베니스에 당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원정 참가를 약속한 십자군 중 3분의 1만 모습을 나타내어 은화 5만 냥밖에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동방제국 왕자 하나가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대겠다고 제안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 현재 황제를 폐위해 달라는 것이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그런 공격은 불가하다고 했지만 아무도 교황의 명령에 신경 쓰지 않았다.
1203년 7월 5일, 십자군이 동방제국 수도에 당도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십자군의 출현으로 심기가 사나워졌다. 이에 시민이 봉기를 일으켰고, 십자군에 반대하는 황제가 동방제국의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자 십자군이 광분했다. 이슬람교도를 무찌르고자 원정을 감행했건만 이제 콘스탄티노플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십자군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로 했다. 십자군에 가담한 성직자 한 명이 “여러분이 이 땅을 정복하여 로마에 귀속시킨다면 이 전쟁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교황의 면죄부를 받을 것입니다” 하고 교황의 승인도 받지 않은 말을 제멋대로 선포했다. 교황의 면죄부를 받는다는 말은, 무슨 짓을 해도 징벌을 받지 않으며 참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1204년 부활절 바로 전 금요일, 겉옷에 붉은 십자가 문양을 새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도시에 세워놓은 황금 조상(彫像)들을 녹였고, 소피아 성당 황금 기물들을 약탈했다.
동방제국도 서방교회도 잔혹하기 그지없던 그 사흘을 되돌릴 수 없었다. 십자군은 그렇게 한때 동방제국이라고 알려진 제국의 영토를 2개월간 통치했다. 시민 봉기로 물러난 동방제국 진짜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남서쪽에 있는 니케아에 제국을 재건했다. 동방 크리스천도 대부분 로마교회를 따르지 않고 니케아로 도망쳤다. 그들은 AD 1261년에 어떤 동방 통치자가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교회는 두 집단(서방제국 로마를 주축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제국 콘스탄티노플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 정교회’)으로 분열하여 현재에 이른다.
<사진설명> 십자군 원정을 이끈 기마대
위 글은 교회신문 <25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