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15>] 국가 통치 기반으로 이용당하는 복음

등록날짜 [ 2011-08-23 11:26:45 ]

프랑크족 로마교회 장악 후 정복 전쟁 일으켜
신성로마제국 건국 후 중세 교회 점점 타락으로

중세가 시작되었을 때, 이교도인 프랑크족은 서방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프랑크족 기원은 오늘날 독일 서부로 알려진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496년에 프랑크족 전투 사령관인 클로비스(Clovis)는 자신의 백성을 기독교의 하나님께로 이끌었다. 또 클로비스는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프랑크족이 한때 서방제국인 지역을 정벌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저항하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600년경에는 프랑크족이 중부 유럽 대부분을 통치했다. 프랑크족이 권력을 확장할수록 로마교회에 대한 그들의 후원 또한 막대해졌다. 754년에 프랑크족 피핀(Pepin) 3세는 중앙 이탈리아 대부분을 로마교회에 바쳤다.

신성로마 제국 탄생
780년 즈음, 피핀 3세 아들 카알 왕이 적들을 상대로 복음전도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한 부족을 정복할 때마다 세례와 죽음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피정복민 90퍼센트 이상이 그가 제안한 ‘구원의 초대’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 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아무튼 그는 모든 신민에게 세례를 강요했는데, 일부 게르만족들이 세례받기를 거부하자 하루에 4500명의 목을 벤 다음 캠프로 돌아가 성탄절을 축하하기도 했다고 한다. 9세기가 시작할 무렵, 카알은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로 알려진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카알이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콘스탄틴의 기부’라는 위조문서가 등장, 중앙 이탈리아에서 로마교회가 행사하던 정치권력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중앙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은 결과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799년, 이탈리아 몇몇 귀족들이 로마교회를 통제하려 했다. 그래서 자기들 사람으로 감독 후보자를 천거했지만 교황 레오 3세의 호의를 얻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들이 레오 3세의 혀를 자르려고 자객을 고용했다. 레오 3세가 어느 정도 폭행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프랑크족 병사 2명이 부상을 입은 교황을 카알의 궁전으로 피신시켰다.

카알 왕은 교황 레오 3세를 환대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레오 3세를 폭행한 귀족들이 카알에게 편지를 보내 레오 3세가 교회 공금을 착복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레오 3세는 황제에게 호소하고 싶었으나 오래 전에 멸망하여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진 서방제국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레네 여제가 동방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레오 3세는 여자에게 자신의 재판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불명예를 씻었을까?

새로운 황제의 대관
800년 12월 23일, 많은 비난과 고발에도 카알 왕은 교황 레오 3세가 결백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틀 후, 성탄절 만찬을 거행하는 중에 교황 레오 3세가 카알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며 “평화로운 최고 황제로 하나님께 왕관을 받은 카알 아우구스투스”라며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역사상 최초로 교회가 황제를 만들어낸 순간이며, 오래 전에 멸망한 서방제국에 동방제국과 비견할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후대 사람들이 ‘샤를마뉴’(Charlemagne) 혹은 ‘카알 대제’(Charles the Great)라고 부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샤를마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은 뒤, 자신이 로마 기독교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 문서를 보존하고 문맹을 퇴치하고자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교회 감독들을 직접 임명했고, 로마교회가 중앙 이탈리아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도록 지원했다.

샤를마뉴 황제가 죽은 후에도 서방제국 부활을 향한 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이름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거룩하지 못한 지도자들
880년에서 980년 사이에 로마 주교(감독)들의 지위(한때 그레고리 같은 경건한 사람들이 맡은 지위)가 고결하지 못한 몇몇 귀족의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로지아’라는 이탈리아 부유한 상속녀가 60년 가까이 로마 주교들을 통제했다. 이 기간에 그녀는 어떤 주교의 어머니가 되기도 했고, 어떤 주교를 살해한 살해범이 되기도 했고, 또 어떤 주교의 정부(情婦)가 되기도 했다.

955년에는 그녀의 손자 요한 12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문란하고 사악한 생활에 빠져 살았는데, 교황이 된 뒤에도 악마 같은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부패와 타락의 풍조를 지속하면서 로마교회 주교 지위를 더럽혔다. 로마교회에는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혁이 찾아왔다. 그러나 개혁과 더불어 분열도 찾아오고 말았다. <계속>


<사진설명> 샤를마뉴 대제

위 글은 교회신문 <25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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