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6.25 전쟁 발발 60주년] 다시없을 민족의 아픔 ‘잊지 말라’

등록날짜 [ 2010-06-15 08:13:26 ]

 ‘서로 도망가고 서로 잡아 죽이는’전쟁의 참사
 어느 분야보다 교회의 상처와 아픔 유난히 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시없는 동족 간의 대 참살극이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폐는 모든 분야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겼지만, 그 어느 곳보다 교회는 더 큰 수난을 겪었다. 교회신문은 2회에 걸쳐 6.25전쟁으로 인한 교회의 수난과 믿음의 순교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불행하게도 기독교인을 색출하고 검거하는 데 기독교인이 앞장섰다.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경동교회 교인을 자처하는 김욱이 나타나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간판을 종로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 환영식을 준비한다며 교인들의 동원을 독려했다. 그는 7월 9일(주일)에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라고 기독교 측에 협박하였다.

할 수 없이 각파 목사들은 서울 감리교 중앙교회에서 인민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위해 모였고, 환영행사를 열기는 했으나 인원이 제대로 동원되지 않아 환영대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해 있던 목사, 장로들은 최문식이 나타났을 때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최문식은 1933년 평양 장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공산당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1946년 대구 철도 파업을 주도하였다. 대구사건이 진압된 후 최문식은 당시 미 군정청의 고급 관리로 있던 김치묵 목사가 같은 동향인 연고로 김 목사에 의해 총살형을 면하고 풀려났으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다시 투옥되었다가 전쟁이 터지자 출옥하였다. 그는 종로 기독교서회에 자리를 잡고 은신하고 있는 목사들을 찾아내어 8월 21일 김일성 정부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열고 목사들을 강제로 동원시켰고, 목사들에게 자수서 제출을 강요하였다. 또한 전 세계에 보낼 남북통일 호소문을 작성한다면서 목사들에게 서명하라고 강제하였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져 서울 수복이 눈앞에 오자 공산당은 숨어 있던 목사들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김인선, 김윤실 목사는 유치장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 목사들은 대부분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장로교회의 송창근, 남궁 혁, 김영주, 유재헌 목사 등과 감리교의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방훈, 김희운, 조상문 목사, 성결교회의 박현명, 이건 목사, 구세군의 김삼석, 김진하 사관 등 60여 명이 납북되어 현재까지 그 생사여부도 알 수 없다. 또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학살당한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순교의 반열에 오른 이들 
박경구 목사는 황해도 장연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계에 투신했다가 느지막이 목회를 시작하였다. 박 목사가 진남포 득신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교사로 있었던 강양욱이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박 목사는 6.25가 터지던 날 주일 새벽에 체포되어 쇠줄로 양 손목과 발목이 묶여 끌려갔는데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무참히 절단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같이 살해된 교인들은 입이 흙과 재로 틀어 막힌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북에서 순교한 이들 중 꼭 기억해야 되는 인물 가운데 주기철 목사가 섬기던 산정현교회의 유계준 장로와 백인숙 전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유 장로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 가족들에게 자비로 생활비를 지급하였고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주 목사 가족들과 자기 가족들을 먼저 이남으로 피난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 공산당으로부터 순교를 당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목사 없는 성도를 안정모 사모와 함께 심방하면서 돌보았는데, 결국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신당동중앙교회 안길선 목사, 김예진 목사가 순교했고, 서대문감옥에서 주채원 목사 등이 순교하였으며, 김응락 장로는 영락교회 앞에서 순교하였다. 김인룡, 김윤실 목사 등은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다가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전북 옥구군 미면 원당교회의 교인 75명 중 73명은 한꺼번에 살해되었다. 전북 삼례교회 김주현 목사는 그의 가족 7인과 함께 순교했고,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가 순교할 때 그의 장모, 부인, 외아들까지 공산당에게 살해당하였다. 황해도 봉산의 계동교회 180여 교인 중 175명이 나무로 된 예배당 안에 갇힌 채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대전형무소에는 남한 각지의 교역자, 평신도들이 수백 명 투옥되어 있었는데 공산당들이 후퇴 직전에 감옥에 불을 질러 이들 모두를 소사시켰다.

6.25를 겪으면서 인적 피해뿐만 아니라 예배당 파괴도 심각하였다. 장로교회 소속 예배당 소실이 152동, 파손 467동, 감리교 소속 예배당 소실이 84동, 파괴 155동, 성결교는 소실 27동, 파괴 79동, 구세군은 소실 4동, 파괴 4동 등이었다. 침례교는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이북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피해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통계일 뿐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19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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