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30 19:18:14 ]
삼위일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로 분열 시작
로마교회(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수 세기 동안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수많은 다툼과 갈등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한 몸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발생한 세 가지 불행한 사건이 교회를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다.
사건1: 누가 우리 신조(信條)를 엉망으로 만들었나?
니케아 신조를 기억하는가? 물론 기억할 것이다. 9세기 크리스천들 역시 이 신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그것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스페인 어느 교회에서 니케아 신조에 라틴어 단어 하나를 첨가했다. 원래 니케아 신조에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는 부분을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고 수정한 것이다. 로마교회(서방교회)는 곧 수정한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다.
당신을 포함한 현대 크리스천들은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이요? 사소한 차이밖에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아들’이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이 왜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첫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니케아 신조를 승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니케아 신조의 내용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서약한 바 있다.
둘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하나님께서 세 위격(位格)을 지닌 한 분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삼위일체를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로마 신학자들은 신적 본질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 똑같이 거주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한 본성이 오직 한 위격 안에서만 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신적 본질이 오직 아버지 안에만 거주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아버지가 이 신적 본질을 아들과 성령과 함께 나누고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아들과 성령의 신적 본질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동방교회 크리스천들은 “성령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고백할 수는 있었지만, 수정한 니케아 신조의 내용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만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면, 아들이 그 신적 본질을(이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인데) 성령과 나누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867년, 동방제국 콘스탄티노플 주교 포티우스가 니케아 신조에 첨가한 부분을 탄핵했고, 5년 후 교황(로마교회 주교)은 ‘아들’이라는 부분을 니케아 신조에서 빼자고 제안했다. 단, 교황은 동방교회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교황이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월한 최고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동방교회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포티우스는 교황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고, 이 일로 한 몸을 이루었던 교회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건2: 로마의 황소가 동방교회를 들이받다
1048년 어느 날, 신발도 신지 않은 순례자 3명(브루노, 훔버트, 힐데브란트)이 로마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로마교회를 변하게 했다. 로마인들은 브루노(Bruno)를 교황 레오 9세로 맞이했다.
브루노는 성직자들이 자녀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했다. 또 귀족들이 교회를 쥐고 흔드는 일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교회를 일체 외압과 통제에서 독립하려고 결연히 싸웠다.
브루노와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황에게 다른 크리스천보다 우월한 권위를 주셨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오늘처럼 교회가 분열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주교(감독) 미카엘(Michael)은 서방교회 로마 주교 브루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교회 중에서 로마 주교에게 충성하는 교회를 폐쇄했다. 이에 브루노는 사절(使節)을 파견하여 화평을 청했다. 사절단 대표는 훔버트(Humbert)였다. 그는 로마를 떠나기 전에 매우 경솔한 내용의 ‘Bull’을 작성했다(Bull은 황소라는 뜻이지만, 라틴어로는 교황의 이름으로 작성한 교서를 뜻한다).
1054년 7월 16일, 훔버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거룩한 지혜의 교회’(소피아 성당)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주의 만찬이 열리는 중이었다. 그는 몸에 지니고 온 교서(Bull)를 마치 성난 황소처럼 동방교회에 내던졌다. 그 교서에는 동방교회가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락했으며(참), 로마에서 건너온 크리스천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으며(거짓), 니케아 신조에서 ‘아들’이란 구절을 삭제했다(완전 거짓)는 지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훔버트는 주의 만찬 탁자에 교서를 홱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교회 문밖에서 신발의 흙을 털며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판하실 것이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에 교회 집사 한 사람이 교서를 들고 훔버트를 따라갔다. 그가 로마교회 주교의 교서를 다시 가져가라고 청했지만 훔버트는 이를 거절하고 돌아갔다.
두 사건(수정한 니케아 신조, 경솔한 교서)이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셋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틈이 메워졌을지도 모른다. 교회의 분열에 결정타를 날린 셋째 사건은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계속>
<사진설명>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위 글은 교회신문 <2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