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16 13:18:32 ]
당시 교회 영향력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크게 작용
민족 지도자 다수 기독교인, 국가 이념에 기초 제공
<사진설명> 8.15 광복을 전후하여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 이념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사진 광복 당시 모습.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초중고 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광복 후 한국 기독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우익(右翼) 삼영수(三領袖)로 불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비롯해 민족 지도자 다수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백범 김구는 광복 후 민족의 당면 과제로 건국(建國)과 건교(建敎)를 제시하면서 “경찰서 열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한민국 건국이념의 기초 제공
당시 교회는 봉건적인 구습과 계급을 타파하며 민주.평등 의식을 고취하고 성경 보급을 통해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기독교인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활동, 105인 사건, 3.1운동, 농촌운동과 절제운동 등을 통해 인간존엄과 계몽운동을 벌이며 민족해방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조선총독부 간 문제는 정교(政敎) 갈등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건국 헌법은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삼균주의를 기조로 삼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나라가 근대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수용한 기독교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다수 민족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통해 그런 사상에 눈을 떴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그 꿈의 실현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좌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더욱 구체화하였고,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이념으로 그대로 채택됐다.
대한민국 건국 헌법이 그 정통성을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1운동의 계승은 바로 민족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광복 후 3.1운동을 계승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세력이 바로 한국 기독교였다. 실제로 기독교는 3.1운동의 정당한 계승자였다. 민족 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해방 후 선교사들 대거 유입
광복 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이상에 기초를 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도들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국 기독교가 추구한 것은 정교분리(政敎分離)였다.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 건설이었다. 이는 초기부터 일관하게 견지해 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도 그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것을 미국에서 몸소 체득해 건국의 새 좌표로 삼고자 했다. 그가 꿈꾼 국가는 바로 그런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승만이 일당독재로 규정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력히 대항한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었다.
교회는 기독교세계봉사회와 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 등 해외 구호단체에서 오는 막대한 구호품을 유입하고 배분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으며, 성경구락부 재건을 비롯해 교육, 의료, 복지 등 사회사업 확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 후 종교 전시장이 될 정도로 종교 자유가 확대된 한반도에는 남침례교와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했다.
그러나 친일 교단인사들의 복귀와 함께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졌고, 이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사상은 결국 교파 분열로 나타났다. 그리고 몇 년 뒤 6.25라는 민족 분단의 고통을 겪었다.
기독교와 반공주의
기독교의 반공주의도 그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광복 후 한국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건국운동에 적극 뛰어든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공산주의 자체는 생산과 분배 수단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포장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정치체제였다. 공산주의는 일당 독재 체제였다. 숙청은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축출하는 최고 무기였다. 공산주의에는 자유나 다름 혹은 다양성이 존재할 여백이 전혀 없었다.
광복 이전부터 기독교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종교(혹은 종교의 자유) 역시 그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광복 후 들풀처럼 번진 공산주의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열정에 함몰하지 않고, 건국 청사진을 제시하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출발할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