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3> 가장 타락한 로마에서 부흥한 기독교

등록날짜 [ 2011-05-19 09:40:30 ]

신과 인격적 관계 원하는 갈망 해소
목숨 걸고 신앙 지킨 순교자 속출해

AD 64년에서 4세기 초, 심한 기독교 박해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지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지킨 시기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계속 크리스천이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품는 ‘인간적 갈망’을 충동하여 그들이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셨다. AD 1세기에도 하나님은 로마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도덕적 안내자를 향한 갈망, 평등을 향한 갈망 그리고 신과 인격적 관계를 원하는 그들의 갈망을 두루 사용하셨다.

기독교는 도덕적 지침을 제공했다
AD 100년경, 로마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유대인과 크리스천은 물론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방인까지 경악할 정도였다. 이에 몇몇 로마인들이 사랑과 공의가 충만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의 고통이 두려워 유대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일에 만족했다.

이들은 유대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행10:2;13:26 참조)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기독교 또한 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할례라는 고통스러운 의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평등과 존중을 제안했다
크리스천의 여성관은 로마인의 여성관과는 매우 달랐다. 어떤 이교도 저술가는 여성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매춘부들은 성적인 쾌락을 위해 존재하며, 젊은 여자 노예들은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며, 아내는 자녀를 낳고 집안 허드렛일을 충실히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켈수스(Celsus)라는 이교 저술가는 “크리스천들은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목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그들이 어리석고 명예롭지 못한 사람들과 노예와 여자와 어린이들만이 회심하기를 바라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크리스천은 여자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열등한 시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여자를 존중한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여자들과 말씀하셨고 그들을 가르치셨다.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도 여자였다. 초대교회에서 빌립의 네 딸은 선지자였다(행21:9). 바울은 유니아를 가리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은 자”(롬16:7)라고 했고, 뵈뵈는 초대교회 여자 집사였다(롬16:1).


<사진설명>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크리스천이 순교했다. 사진은 변증가인 저스틴 마티 순교 장면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제공했다
로마인들은 고대의 비인격적 신들이 더는 그들과 맞지 않다고 느꼈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은 영적 세계와 직접적인 접촉을 제안했으며, 더욱이 기독교는 신과 직접적인 교제 이상의 것을 제공했다.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신 하나님, 인간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했다(사53:3~7;히2:17~18).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깨달음은 수많은 신자에게 힘이 되었고, 그들을 순교의 길로 인도했다. 프랑스 리옹 인근에서는 크리스천 50여 명이 집단으로 순교했다.

블란디나라는 여자 노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모진 고문에 시달렸지만, 황제에게 분향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문하던 사람들이 옷을 벗기고 원형 경기장 십자가에 그녀를 매달아 사나운 짐승들을 풀어서 살점을 뜯어먹게 하려 했다. 그렇지만 굶주린 짐승들조차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고문자들이 그녀를 십자가에 매달아 채찍질했다. 그래도 그녀가 신앙을 굽히지 않자 그들은 벌겋게 달군 쇳덩이 위에 그녀를 내던졌다. 심하게 뒤틀린 그녀의 여린 육체를 황소가 뿔로 받아 땅에 내치고서야 블란디나는 죽고 말았다.

후일, 불란디나가 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본 동료 크리스천들은 “자매의 모습 속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그들의 슬픔을 아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41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