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3-23 17:26:40 ]
담임목사 목회 방침에 절대 순종 절대 섬김
성령으로 한마음 한뜻 되어 목회 사역 동참
<순서>
① 연세중앙교회 정체성(正體性)
② 평신도사역
③ 청년회 활동
④ 흰돌산수양관 사역
연세중앙교회는 20여 년간 매년 동계.하계에 연인원 수십만 명이 참석하는 초교파 행사인 흰돌산수양관성회를 개최한다. 이 흰돌산수양관성회에는 매회 수백 명에 달하는 성도가 자원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성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자 몇 개월 전부터 전 교회가 한마음으로 준비한다. 이 모든 성회를 진행하는 동안 필요한 주차.주방.안내 등 모든 충성을 평신도들이 담당해왔다. 흰돌산수양관 동계.하계 성회에 참석한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는 연세중앙교회 성도들이 섬기고 충성하는 모습에 큰 은혜를 받아 “말씀과 더불어 성도들의 모습만 봐도 은혜롭다”고 입을 모은다.
또 궁동성전 봉헌 이후 연세중앙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대규모 문화공연, 기독교 행사 등을 한치의 실수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치러낸 것도 바로 성도들의 몸에 밴 순종과 섬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도들의 이런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 ‘감사의 힘’이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에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인격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죽도록 충성할 수밖에 없으며, 이 감사에서 솟아나는 열정은 프로 근성을 초월한다.
둘째, ‘영혼의 때를 향한 분명한 목적의식’이다.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려는 진실한 마음이 끊임없는 열정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충성은 ‘영혼 구원’이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또 연세중앙교회 성도들의 순종과 섬김은 윤석전 담임목사의 ‘섬김 리더십’이 밑바탕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성도들도 주의 일에 항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온 힘을 다하며 삶 전체를 열정적으로 불태우는 담임목사의 삶을 본받아 주를 향한 충성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순종하며 섬긴다.
윤석전 목사는 ‘섬김 리더십’을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오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새로 온 사람을 섬겨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께, 성도에게 섬김을 실천함으로 모범이 돼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섬김이 리더십이 되려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즉 맡겨주신 영혼이나 일을 머슴처럼 철저히 섬기며 솔선수범하여 뛰어드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고, 동시에 마음과 생각은 항상 내가 교회 주인이라는 경영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섬김 리더십은 교회 전반을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목회 원동력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시스템을 갖춰도 이런 동기부여가 지속적이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힙니다. 목회자는 항상 성도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말씀으로 깨닫게 하고 감동받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성도들에게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말입니다.
연세중앙교회 평신도 활동이 어느 교회보다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섬김 리더십 때문입니다. 교회는 최소한의 행정적 뒷받침만 해주면 됩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만약 성도들이 자원해서 하는 이런 섬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오늘날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있기에 현재 연세중앙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목회자가 지닌 탁월한 영성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목회자 혼자 교회를 섬기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성령으로 한마음이 돼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 전도 사명을 함께 이루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세중앙교회는 평신도 활동이 어느 교회보다도 활발하다. 한국 교계 어디에도 평신도가 중심이 돼서 일하는 교회는 그리 흔치 않다. 연세중앙교회는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평신도가 주체가 돼서 자발적인 섬김과 충성을 한다. 주의 일에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평신도도 예외가 아니다.
연세중앙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경주를 하도록 모든 환경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