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2] 로마에 함락당한 예루살렘

등록날짜 [ 2011-05-11 13:59:12 ]

유대인은 책임을 크리스천에게 돌리며 비난
로마 황제들은 ‘자칭 신(神)’으로 경배 강요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1세기 중반, 정복자 로마인과 피정복자 유대인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였다. AD 50년 어느 날, 유대인 수천 명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성전보다 높이 솟은 망루에 있던 로마 병사 한 명이 겉옷을 들어 올리고 상체를 수그리더니 유대인들 쪽으로 엉덩이를 향하여 음란한 자세를 취하며 괴성을 질러댔다. 이런 모욕적인 행위에 유대인 군중이 봉기했고, 이 사건으로 유대인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AD 64년, 새로운 로마 통치자 플로루스가 유대에 당도했다. 그는 두 해 동안 유대인들을 극악하게 모욕했다. 이에 몇몇 유대인 지도자들이 성전 약탈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병사들을 시장으로 보내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무고한 백성의 피가 메마른 예루살렘 거리에 강처럼 흘렀고, 그날 하루 동안 유대인 3600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몇 해 동안 자라온 로마를 향한 분노의 씨앗이 반란이라는 싹을 틔웠고, 마침내 유대 반란군이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있는 로마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때 네로 황제가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병사 6만 명을 주었다.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을까? 바로 갈릴리와 유대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안의 원정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였다. 갈릴리 백성 수천 명이 진군해오는 군대를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베스파시안 장군이 예루살렘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로마에서 급전이 날아왔다. 네로가 자살했다는 전갈이었다. 베스파시안은 이때를 왕좌를 차지할 호기라고 판단해 예루살렘 공격을 포기하고 곧장 로마로 돌아갔다.

얼마 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장군 시절에 완수하지 못한 소임도 잊지 않았다. AD 70년 봄, 군대를 급파해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8월 5일,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로마에 저항한 반란군들은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신성한 도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려갔고, 성전은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벽 하나만 남기고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유대 전역의 반란군 요새들이 로마군에게 차례로 점령됐다. 마지막 요새인 사해 근처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유대인 반란군은 항복하는 대신 자살을 택했다. 이로써 유대인 봉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반란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와 유사한 비극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크리스천들을 포함하여 로마의 미움을 살 우려가 있는 모든 비주류 무리를 회당에서 내쳤다. 그리고 AD 90년경, 회당의 주간 기도회 기도문에 ‘나사렛 사람들’을 저주하는 문구를 포함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이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와 회당, 기독교와 유대교, 크리스천과 유대교도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신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AD 69년에서 81년까지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베스파시안의 아들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도미티안 황제는 사후에 신 대접을 받던 다른 황제들과 달리, 살아 있는 동안에도 신으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는 통치 기간에 ‘주(主)와 하나님’이란 호칭을 받기 원했다.

또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잃었기 때문에 로마에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율령을 반포했다. 물론 유대인들은 반발했다. 이에 도미티안은 모든 유대교 관행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의 전횡을 휘두르는 횡포는 크리스천들의 예배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대적인 박해가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했다.

새 황제 트라얀이 즉위한 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때 소아시아 북쪽 지방의 총독 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크리스천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설명했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기독교 신앙을 철회하도록 기회를 세 번 주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자들은 모두 방면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로마인들은 로마로 데려가 별도로 재판을 받게 하는 한편, 로마인이 아닌 일반 백성은 즉시 처형했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가 일 처리를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4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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