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9]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신’으로 추대받다

등록날짜 [ 2011-06-29 09:57:29 ]

초기에 이단 배척했으나 점점 신앙 기준 흔들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타나시우스 끝까지 핍박

니케아 공의회 이후, 콘스탄틴 황제는 돌연 태도를 바꿔 평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래서 327년, 모든 교회가 잠잠히 공조하는 가운데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된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려 했다. 이런 황제의 행동에 감히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놀랍게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라는 감독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타나시우스는 검은 피부에 작은 체구를 지닌 사내였다. 얼마나 작았던지 그의 대적들이 그를 ‘검은 난쟁이’라고 놀려댈 정도였다. 어렸을 때 그는 이집트 사막에 홀로 살던 경건한 크리스천 은둔자(혹은 수도사, ‘수도사’는 ‘홀로’라는 뜻을 지닌다)를 시중들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수도사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나는 감독이 되기를 원하지 않소
325년, 아타나시우스는 집사 자격으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공의회가 끝난 뒤,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병으로 죽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죽기 전에 아타나시우스에게 후임자가 되어 달라고 청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교인들을 지도하기보다 섬기기를 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감독을 거부하고 사막에서 은둔하는 친구들에게로 도망쳤다. 몇 개월 후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 알렉산드리아교회는 그가 극구 사양했음에도 그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아타나시우스와 콘스탄틴은 즉시 충돌하고 말았다. 아리우스를 교회 일원으로 복권시키려는  콘스탄틴의 시도에 아타나시우스가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을 여전히 거부하는 아리우스를 용인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은 “아리우스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그대가 막았다는 말이 과인의 귀에 들리면 그대를 유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이렇게 5년 동안 위협한 끝에 반역이라는 엉터리 죄목을 씌워서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337년,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아리우스 추종자 한 사람에게 침례를 받았다(4세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침례 받은 후에 범한 죄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린 시절에 침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임종 직전에 침례를 받는 사례가 흔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전에 이교(異敎) 우상들을 없애려고 많은 일을 한 콘스탄틴이 사후에 이교 우상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로마 원로가 콘스탄틴을 ‘신’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
362년, 유배되었던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고, 콘스탄틴의 조카 줄리안이 로마 새 황제가 되었다. 줄리안은 기독교를 몹시 싫어했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줄리안이 여섯 살 때, 콘스탄틴의 아들이 재판도 하지 않고 줄리안 가족을 몰살했기 때문이었다. 줄리안은 콘스탄틴의 아들들 눈치와 공포 속에 떨며 어린 시절을 외롭게 지냈다.

줄리안이 황제가 되자 기독교 성직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또 교회를 혼란스럽게 할 생각으로 이전에 유형에 처한 감독을 모두 복권시켰다. 정치적 후원을 잃은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처음에는 혼돈이 일어났다. 하지만 줄리안이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귀를 기울였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회의하자고 요청했다. 그들은 다 같이 모여서 아리우스 사상을 거부했다. 서방교회 감독 몇 사람은 동방교회가 왜 “아버지(성부)와 동일 본질을 갖고”라는 구절을 좋아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감독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 본질을 공유한 세 위격이라는 데 의견 합일을 보았다.

줄리안 황제는 아타나시우스가 교회를 집결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아프리카 사막으로 도피했다. 줄리안 황실 근위대가 아타나시우스를 발견했을 때, 그는 나일 강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황실 배가 아타나시우스의 느릿한 배를 따라잡아 뱃머리를 선미에 바짝 갖다 댔다. 병사가 소리쳤다.

“아타나시우스를 본 적이 있는가?”
이에 작은 체구인 감독은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가 바로 당신 앞에 있소. 부지런히 따라가면 곧 잡을 수 있소!”

이에 황실 배는 속력을 더 내더니 아타나시우스 배를 지나쳐서 저 멀리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줄리안이 죽을 때까지 사막 수도사들과 함께 은둔하며 지냈다. 줄리안이 죽고 나서 10년 뒤 아타나시우스 역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었다.


<사진설명>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등 많은 공로를 세웠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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