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6-15 09:25:31 ]
우상 숭배하지 않는 크리스천과 군중 간 갈등 깊어져
로마 황제가 박해하는 강도는 날이 갈수록 세져만 가고
AD 247년에 로마는 건국 1000년을 맞이했다.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사흘 밤낮을 마시고 떠들며 로마의 천 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난잡하고 방탕한 이교도들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 역병이 로마 전역을 휩쓸었다. 로마인들은 크리스천들이 로마 신들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데키우스(Decius) 황제는 진노한 신들을 달래려고 범제국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다. 로마 당국은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목적으로, 우상에 제사를 한 시민에게 ‘제사 증명서’를 발급했다. 제사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시민은 크리스천으로 인정되어 누구든지 현장에서 체포.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때 오리겐을 포함한 많은 감독이 옥중에서 얻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데키우스 황제가 AD 25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 가혹한 역경도 금세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박해는 수십 년 동안 지속하며 중대한 문제를 낳았다.
우상 숭배에 내몰린 크리스천
크리스천 가운데 가혹한 박해를 피하려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사람들 수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이 교회로 복귀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회개했다고 주장했지만 교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진정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거짓 신자들을 배제하고 회개한 크리스천만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봉착한 사람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Cyprian)이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키프리안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숨어 있기를 원하시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여 도피했다. 그런데 박해가 그쳐서 교회로 돌아와 보니 모든 신자가 혼돈에 빠져 있었다.
키프리안은 박해 당시 가짜 제사 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녔던 크리스천들을 다시 받아주라고 촉구했다. 단, 그런 크리스천들은 교회가 그들을 용인하기 전에 슬픈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외면적 증거를 보여야 했다. 이 외면적 증거로 키프리안은 기도와 금식을 요구했다. 키프리안은 적어도 진정한 신자라면 내적 회개와 아울러 외적으로도 회개했다는 표시를 나타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키프리안의 접근방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순교를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애쓴 사람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박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한 감독은 어떤 유효한 예배도, 주의 만찬도, 침례도 집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을 도나투스(Donatus)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나중에 ‘도나티스트’(Donatists)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7년 후, 또 다른 박해의 파도가 제국에 휘몰아쳤다. 이번에는 키프리안 차례가 되었다. 로마 재판관 한 명이 키프리안에게 제사를 명령했지만 키프리안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그는 난도질당하여 순교했다.
로마의 마지막 박해
284년에 로마 왕좌를 찬탈한 디오클레티안은 광활한 제국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권력이 미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제국을 둘로 분할했다. 그는 제국을 동과 서로 분할한 뒤 서방제국의 통치를 공동황제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방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유혈 권력투쟁을 미리 방지하려고 부황제를 동과 서에 각각 한 명씩 두 명을 두었다. 황제가 죽거나 물러나면 부황제가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안은 크리스천들에게 자행한 만행만 빼면 모든 면에서 탁월한 통치자였다.
동방제국 부황제, 즉 디오클레티안 후계자는 갈레리우스(Galerius)였다. 군대를 지휘하던 갈레리우스는 크리스천들이 상관에게 충성하기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박해를 건의한 사람이다. 이에 디오클레티안은 교회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이 박해는 디오클레티안이 물러난 뒤 한층 가혹해졌다.
디오클레티안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공동황제가 다스리는 서방 로마까지 권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서방제국 공동황제의 손발을 단단히 붙들어놓으려고 공동황제의 아들 콘스탄틴을 납치하여 볼모로 잡아두었다. 그러다가 305년, 콘스탄틴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눕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풀어주어 부친의 병문안을 가게 허락했다.
얼마 후 콘스탄틴의 부친이 죽자 콘스탄틴은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을 서방제국의 공동황제로 즉위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이로써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틴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만 갈레리우스가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임종을 앞둔 갈레리우스는 크리스천 박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우상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 열정적으로 예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갈레리우스는 “누구든지 공공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해도 좋다”는 내용의 율령을 반포했다.
312년, 권력에 굶주린 두 명,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는 서방제국의 통치권을 차지하려고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막센티우스는 서방제국 수도인 로마로 퇴각했다. 그런데 콘스탄틴 군대가 로마로 진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일로 교회와 로마제국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4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