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09 13:51:47 ]
428년, 네스토리우스는 교회감독이 되려고 콘스탄티노플로 이사했다. 그는 ‘그다지 찬란하지 못한 불꽃을 일으키며’ 자신의 임기를 시작한다. 아리우스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몰아내려고 감독이 되자마자 아리우스파 교회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나 화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서 한 구역을 온통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이 방화로 ‘선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단순한 방화범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자였다. 더욱이 그의 신학적 재능은 방화 기술에 비할 수 없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을 잉태한 자’라는 뜻)’라고 부르는 데 반대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일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곡해했다. 그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는 두 개의 인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마리아는 단지 인간의 인격만 낳은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본성인가? 두 개의 본성인가?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Cyril)은 뛰어난 사상가였으나 냉혹하고 부도덕한 인간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히파티아라는 여인을 살해하는 일을 승인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이 알렉산드리아까지 퍼졌을 때, 키릴은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를 두 개의 인격으로 나누었다고 비판했다. 이로 말미암아 거센 논쟁이 일어났고, 교회는 또다시 분열 위기에 놓였다.
이에 431년, 동방제국의 황제가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때 키릴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네스토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정죄한 뒤 폐회를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의 친구들이 또다시 회의를 소집하여 키릴을 정죄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도착한 로마교회의 대표들이 회의를 다시 소집했고 키릴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당했다. 이로써 교회 이야기 중 가장 혼란스러웠던 한 장(章)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과연 정말 막을 내렸을까?
키릴의 후계자들은 단성론자라고 알려졌다. 그들은 예수가 두 개로 나뉜 인격을 가졌다는 사상(네스토리우스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이렇게 곡해했다)을 격퇴하고자 열심을 냈지만 너무 과도한 나머지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그들은 마치 ‘바다가 포도주 한 방울을 삼키듯이’ 예수의 신적 본성이 인간의 본성을 흡수해버렸다고 가르쳤다. 이 단성론은 특히 콥트(Copt) 교회, 즉 이집트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은 단성론 사상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회의는 또다시 소집되었다.
<사진설명>칼케돈 공의회
마침내 합의하다
로마의 감독 레오(Leo)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늦게 받아 공회에 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한 문서인 ‘톰’(Tome)을 공회에 보냈다. 레오는 네스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갖고 있으며 그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결합하여 있다고 믿었다. 단성론 진영은 레오의 ‘톰’을 무시하고 그가 파견한 대변인도 거칠게 대했다.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451년, 새로운 황제가 칼케돈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곳에서 감독 500명 이상이 모여 니케아 신조와 키릴의 저작들과 레오의 ‘톰’을 깊이 연구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리스도를 성경적으로 묘사하는 아름다운 고백이 탄생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혼동되지도, 분리되지도, 나누어지지도 않는 두 본성을 갖고 있으며…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두 인격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를 이같이 이해하는 것을 양성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논쟁이 합일점에 도달했다. 유배지에 있던 네스토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고백과 자신이 가르쳤던 것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리아와 이집트의 몇몇 크리스천은 칼케돈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단성론을 지지했다. 두 그룹은 로마와 동방 교회들에게서 분리되었다. 오늘날에도 콥트 교회와 시리아 정교회는 단성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이집트 교회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동방교회들과 계속 교류했다. 이런 이집트 교회들이 멜키트(Melkite) 교회로 알려졌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5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