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22>] 흑사병이 창궐한 비극의 14세기

등록날짜 [ 2011-10-11 13:08:41 ]

면죄부 판매 등 수도사 점점 타락의 길로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 3분의 1 죽음 맞아

사표를 낸 교황
1294년, 추기경들이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도사 첼레스티노(Celestine)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전 교황들은 말을 타고 로마에 입성했는데 첼레스티노는 맨발에 나귀를 타고 로마로 들어왔다.

첼레스티노 5세는 평범한 시민을 사랑하는 노년 목회자였다. 그러나 로마교회 주교 직무는 대중 지향적이거나 목회자답지 않았다. 교황들은 세속 국왕들처럼 정책을 집행했고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살았다. 소박하고 경건한 수도사 첼레스티노는 그런 정치 게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5개월 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 추기경들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교황 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소박한 갈색 겉옷을 입고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 후 보니페이스(Boniface) 8세라는 냉혹한 정치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보니페이스 8세는 로마주교(교황)가 서구 사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1302년에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m Sanctum)」라는 교황 교서를 반포, 교황이 유럽 모든 국왕보다 더 우월한 권세를 지닌다고 했다. 이 주장에 누구보다 불만이 큰 프랑스 국왕 필립 4세는 교황을 납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보니페이스 8세는 최고 권세를 주장한 자신의 거만함과 함께 죽고 말았다. 보니페이스 8세 후임자는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재임 기간 내내 유배지를 떠돌며 ‘열매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 가득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누군가가 식탁에 독이 든 무화과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후 어떤 교황이나 황제도 서방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각 나라 제후와 영주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신성하지도 로마인도 아닌)가 중앙 유럽을 통치했지만, 그는 단지 독일이라는 나라 일개 국왕에 지나지 않았다.

차기 교황 클레멘스(Clemence) 5세는 교황 교서도, 국왕들도, 심지어 식탁 위에 놓인 과일도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 변경(邊境)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피신했다(이를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한다). 그리고 이후 72년 동안 여러 교황이 그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이때에 주교들은 공공연히 중요한 직위를 거래했고(성직매매), 수도사들은 마치 행상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면죄부를 팔았다.

결국 ‘금욕주의 성직자’라는 단어는 기억 저편으로 흐릿하게 사라졌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성직자 한 명이 구매를 꺼리는 여자에게 “당신이 적어도 두 명이 넘는 성직자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텐데?” 하고 협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성직자들이 이렇게 면죄부를 팔아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도 힐책하지 않았다.

정치적, 도덕적 혼란이 극에 달한 이 시기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고 알려졌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듯이, 교회 최고 성직자가 로마에서 쫓겨나 아비뇽에 갇힌 것이다. 그러나 14세기 유럽에 혼돈을 가져온 원인이 이 바벨론 유수만은 아니었다.

1337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사망한 프랑스 국왕의 조카)가 프랑스 왕위까지 요구,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실제로 116년 동안이나 싸웠다)을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시련이 부패한 교회와 피로 얼룩진 전쟁으로 신음하는 유럽사회를 강타했다.
 

<사진설명> 흑사병 당시 유럽을 묘사한 그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1347년 10월 어느 날, 그리 달갑지 않은 ‘나그네’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화물선 승선을 서둘렀으니, 그의 정체는 바로 몸에 병원균을 잔뜩 지닌 쥐벼룩을 키우는 자였다. 결국, 선원들은 화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고향으로 가져오고 말았다. 그들의 팔과 다리에는 검은 반점이 부풀어 올랐고, 반점이 터지면서 검은 고름이 흘러나왔다.

그 후 4년 동안, 유럽과 소아시아(터키)에 흑사병이 창궐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인구 88퍼센트가 희생당했고, 파리에서는 매일 800명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매장하지도, 축복을 받지도 못한 부패한 시체들이 거리에 나뒹굴었지만,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모두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고 기록했다.

어떤 시민은 흑사병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난잡한 파티에 몰입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참회의 행렬’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교황의 명을 어기면서 유대인 거주지역을 불태우고 그들을 도살했다. 그래도 역병은 멈추지 않았다.

각 도시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매질하며 하늘을 향해 “살려주소서! 살려주소서!” 하고 울부짖었다. 교황은 군중의 어리석은 행동을 즉각 중지시키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폭도처럼 날뛰던 군중이 서서히 흩어졌고, 역병도 진정됐다.

나중에 교황은 흑사병이 1347년부터 1350년 사이에 238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추정했다. 그것은 유럽 인구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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