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9-21 11:09:05 ]
점점 규율에 매이는 중세 교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고 유유히 흘러
위대한 모라비아인의 실패
862년, 모라비아(Moravia, 체코 동부) 왕이 자기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동방교회에 요청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 감독 포티우스는 키릴(Cyril, 5세기 부패한 감독 키릴과 다른 인물)을 모라비아 슬라브족에게 보낼 사절로 임명했다. 키릴은 데살로니가 출신인 슬라브인인데, 콘스탄티노플로 건너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키릴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기 전에 성경을 모라비아 언어로 번역하고자 슬라브어 알파벳을 만들었다. 하지만 로마와 독일 선교사들은 그의 노력에 반대했다. 성경과 예배에 쓰이는 언어는 라틴어처럼 ‘거룩한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869년, 키릴은 이 문제를 로마 주교(감독)에게 호소하고자 자신의 동생 메소디우스와 함께 로마를 방문했다. 로마 주교는 성경을 대중 언어로 번역해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모라비아에서 사역하되 자신의 통제를 받으라는 것이다. 키릴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모라비아로 돌아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동생 메소디우스는 모라비아에서 계속 사역했다. 그런데 정말 불행하게도 모라비아 사람들은 키릴이 번역한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895년, 헝가리인들이 모라비아를 침략하는 바람에 키릴의 뒤를 이은 선교사들이 불가리아로 도피했다. 키릴의 사역은 모라비아에 뚜렷한 궤적을 남기지 못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모라비아 사역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키릴의 노력이 모라비아에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불가리아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불가리아의 제후 보리스는 키릴 후임자들이 불가리아로 도피해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선교사들의 도착과 더불어 불가리아 백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도왔다. 키릴 후임자들은 키릴의 선교법을 더욱 다듬었다. 그들은 키릴이 만든 알파벳을 불가리어에 맞게 변형해서 불가리아 대중 언어로 설교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900년경에는 불가리아가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키릴이 만든 알파벳(키릴 자모음)은 유럽과 러시아 남동부 지역 문어체의 근간이 되었다. 키릴과 그의 동생은 실패한 선교사로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버나드
클뤼니 수도원의 명성은 당대 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반면에 문화를 온통 바꾸어놓은 그 명성이 그 공동체를 죽이고 말았다. 클뤼니 수도원이 유명세를 타자 프랑스의 모든 귀족이 그곳을 후원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귀족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재물이 풍성해지자 천 명에 달하는 수도사와 수녀는 더는 노동하지 않았고 가난한 이웃들도 돌보지 않았다. 수도원 예배당 벽에는 금과 각종 보화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이에 1098년, 클뤼니 수도원 수도사 21명이 청빈과 노동을 강조한 베네딕트 규칙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프랑스 시토 부근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들은 시토회(Cistercians) 수도사라고 알려졌다. 시토회 규칙은 매우 엄격했고 수도사들은 청빈을 강조하고자 겉옷을 염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1112년 무렵 시토회 수도사들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규칙이 너무 엄하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낙담한 수도원장은 수도원 문을 닫기로 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수도원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가 무려 31명이나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도사가 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중에 클레르보 출신인 버나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중세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수도사 버나드는 그의 이름을 딴 개(犬) 품종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
버나드는 감독이 된 적이 없지만 로마교회를 30여 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클뤼니 수도사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했다. 아나클레투스 2세와 인노센트 2세가 서로 로마 감독이라고 주장했을 때, 인노센트 2세가 로마의 진정한 감독이라고 선포한 장본인도 바로 그였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일까? 버나드는 청빈한 생활로 농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친 설교로 가장 완고한 사람의 마음마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을 찾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버나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서 흐르는 영원한 사랑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한 버나드는 곧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중세 성상(聖像)들은 그리스도를 진노한 심판관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두려운 이미지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버나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돕고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때부터 아기 예수의 그림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그림들이 이전 성상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계속>
<사진설명> 중세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사 클레르보 출신 버나드.
위 글은 교회신문 <2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