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20>] 거지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도성

등록날짜 [ 2011-09-27 13:55:30 ]

1100년대 새로운 유형의 ‘떠돌이 설교자’ 출현
프란체스코수도회 등 백성에게 많은 지지 받아

유럽은 110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더는 야만족 침입에 위협받지 않았다. 백성은 지방의 유력한 지주들에게 충성하는 데서 벗어나 왕이나 문화 같은 더 큰 제도에 관심을 두었다. 도시에서는 농노(農奴)계급과 귀족계급 사이에 떠돌이 상인(商人)계급이 출연했다. 이 중간계급은 현금을 받고 물자와 용역을 거래했다.

떠돌이 상인에게는 떠돌이 설교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유형의 설교자도 출현했다. 탁발수도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탁발수도사들은 도시로 떼 지어 모여든 상인과 농민에게 설교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왈도가 누구지
1173년, 거리의 가수 한 사람이 길모퉁이에 무대를 꾸며놓고, 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어느 귀족 이야기를 상연했다. 그런데 이를 본 왈도(Waldo)라는 프랑스 상인이 깊은 감명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는 한편, 전 재산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그는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자신도 후에 탁발수도사가 됐다.

그러나 왈도는 성경을 직접 공부하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연옥이나 교황의 권위에 대해 언급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거부했다. 왈도가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자 곧 그의 주변에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리옹의 가난한 백성’이라고 불렀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가난한 백성이 성경을 배웠다. 또 누구나 이해하는 대중 언어로 말씀을 전파했다.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왈도파라고 불린 이들이 프랑스 전역을 뒤덮었다.

왈도는 교황에게 자신의 운동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황은, 주교가 설교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설교할 수 있다는 조건을 걸고 수락했다. 하지만 3년 후, 왈도는 리옹의 주교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설교했다. 이에 리옹의 주교는 ‘가난한 백성’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이 추방 조치로 왈도파 중 몇 사람은 로마교회로 돌아왔지만, 대다수는 교회의 판결을 무시한 채 계속 말씀을 전파했다.

왈도는 죽어서도 여전히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왈도파 파문 조치를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200년경에 개최한 종교재판은 왈도파를 처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왈도파 신자 수백 명이 십자군에게 학살당했고, 생존자는 독일과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주교 앞에서 벌거숭이가 된 기사
로마교회는 탁발수도사 집단을 비난했지만, 모든 집단이 비난받은 것은 아니었다. 탁발수도사 한 명이 어떤 집단을 설립했는데, 나중에 그 집단이 로마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신앙공동체가 됐기 때문이다.

그 일은 1204년에 시작됐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기사들이 적대 관계에 있는 도시를 향해 진격했다. 옷감 상인의 아들인 22세 청년 프란체스코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는 원정 도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고, 완전히 변해 집으로 돌아왔다. 프란체스코는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자 친구 한 명이 “자네, 뭐가 그리 좋은가?” 하고 물었다.
“왜냐하면, 말이야!”
프란체스코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가난’이란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야!”

프란체스코는 문둥병 환자들의 상처에 입을 맞추었고, 제 아버지의 옷감을 내다 팔아 예배당을 수리했다. 성난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아들을 주교 직무실로 끌고 갔다. 프란체스코는 주교 앞에 나아가 아버지가 입혀준 비싼 옷을 벗어서 아버지 손에 건네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저는 그분만을 믿을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농가 한 곳 허수아비에게서 벗겨온 넝마가 된 갈색 겉옷에 십자가 표시를 한 다음, 그것을 몸에 걸치고 끈으로 허리를 동였다. 그리고 “예수님! 제가 일평생 제 것을 소유하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다.

1208년 2월 24일, 프란체스코는 성구집(聖句集)을 폈다. 그날의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8~10절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프란체스코수도회라고 함)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고 1년 후, 프란체스코는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자신의 운동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이끄는 수도회가, 클뤼니 수도회가 그랬던 것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프란체스코 수도단 모든 형제(수도사들)는 겉옷 두 벌 이외에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었다. 수도사들의 겉옷은 언젠가 프란체스코가 농가 허수아비에게 벗겨온 넝마처럼 소박했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수도단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지적했지만, 마침내 그들을 승인했다.  <계속>

<사진설명
> 아시스의 수도사 프란체스코

위 글은 교회신문 <2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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