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18>] 부패한 귀족들이 수도원을 통제하다

등록날짜 [ 2011-09-13 15:45:57 ]

거룩한 신앙인조차 중세라는 울타리에서 못 벗어나
정치와 종교 간 유착 시작되면서 점점 수렁 속으로

중세 시대 역사를 공부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당시 진정한 크리스천은 어떤 교회에 속해 있었을까?” 하고 종종 질문한다. 현대 크리스천 대부분은, 참된 크리스천이 폭력적인 십자군과 부패한 성직자들 바로 옆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요즘에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생각이 맞지 않으면 금세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혹은 새로 교회를 세우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거룩한, 사도들의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시대 교회 원리가 크리스천 세계에 널리 퍼진 관습이나 사상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시 어떤 교회 신자들은 채식을 고집했고, 어떤 교회 신자들은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또 어떤 교회 신자들은 방언을 말했고, 어떤 교회 신자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교회 교인들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어떤 교회 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교회 일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국과 아일랜드 선교의 중심지였던 중세 초기 수도원 수도사와 수녀들은 이교(異敎) 지역에 들어가 작은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교도보다 훨씬 더 발달한 농업기술을 지니고 이교 지역에 들어갔다. 이교 원주민들은 당연히 신앙공동체가 가진 높은 농업생산력에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이교 원주민들과 수도사들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고,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원주민들이 지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호기심은 종종 참된 회심을 낳았다. 그러나 800년대 후반에 들어 이런 신앙공동체들에 쇄신이 요구되었다. 부패한 귀족들이 수도원과 수녀원을 통제하는 한편, 바이킹들이 수도원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사냥개를 포기한 듀크
909년, 프랑스 아키텐의 듀크 윌리엄 3세가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했다. 윌리엄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신앙공동체를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베르노(Berno) 라는 경건한 수도사에게 수도원을 이끌어달라고 협조를 구했다.

그런데 베르노가 듀크 윌리엄에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수도원 건물을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이 클뤼니라는 것이었다. 클뤼니는 윌리엄의 사냥터였다. 물론 윌리엄은 반대했다. 하지만 베르노는 사냥개를 먹이면 영원한 상급을 얻을 수 없지만 수도사들을 먹이면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윌리엄을 설득했다.

이에 윌리엄은 사냥개들을 풀어주고 자신의 재산을 수도원장에게 양도했다. 또 윌리엄 본인은 물론 어떤 주교도 수도원에 간섭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클뤼니 수도원 수석 수도사(수도원장)만이 신앙공동체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 수도사들은 성경과 베네딕트 규칙에 온전히 순종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자 유럽 전역 시민이 클뤼니 수도사들의 숭고한 이상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성직자와 감독들을 평가하였고, 성직자들의 성결함을 바라는 시민의 갈망은 로마 감독 브루노가 로마교회 감독 직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결과를 낳았다. 듀크 윌리엄이 애지중지하던 사냥개들을 포기하고 수도사들이 꽉 들어찬 수도원을 택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손이 잘린 다메섹의 요한
시리아 다메섹(다마스쿠스)에 살던 요한은 강력한 정치적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동방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으며 이슬람 교도가 통치하는 동안에도 헌신적인 크리스천으로서 그의 신앙을 지켰다. 성상 논쟁이 벌어졌을 때, 요한은 ‘키스하는 자들’(성상 숭배자들)의 편을 들었다. 성상 예배와 성상 공경의 차이를 식별한 사람도 바로 요한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경력은 어떤 한 사람이 꾸며낸 간교한 거짓말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성상 파괴를 지지하는 동방 황제가 요한의 서명을 위조해 문구를 꾸민 뒤 이슬람 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동방 황제는 요한이 다메섹 시를 기독교 군대에 넘기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면서 그 증거로 가짜 문서를 내놓았다.

요한은 이슬람 법정에서 모반 판결을 받았다. 요한에게 내린 1단계 형벌은 평생 수도원에서 은신하라는 것으로 그리 가혹하지 않았다. 그러나 2단계 형벌은 지나치게 야만적이었다. 바로 요한의 오른손을 자른 것이었다.

요한은 수도원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바구니를 짰고, 바구니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요한은 수많은 찬송 시를 썼다. 오른손이 잘린 그는 왼손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을 질투한 동료 수도사들이 그를 다시 다메섹으로 보냈다. 요한은 한때 지주로서 권세를 떨치며 살던 마을의 거리에서 바구니를 만들어 팔며 평생을 살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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