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0-18 13:13:46 ]
무수한 박해에도 신약시대 영적 계승 이어와
현재 미국 남침례교는 단일교파로 세계 최대
침례 고수는 그것이 성경적 가르침이기 때문
‘침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에 대한 질문은 침례 교회사가(敎會史家)들 사이에서도 연구대상인 문제다. 신약 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던 시기를 신약교회인 침례교회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세 가톨릭교회 내부 개혁세력인 루터나 칼뱅의 개혁교회 운동에 견주어 외부 개혁세력 중심이던 재(再) 침례교파에서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침례교도의 영적 선조(先祖)는 신약성경 시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일반 교회사(敎會史)에는 감추어져 있으나 신약 성경에 따른 표준과 모범을 이어온 일단의 무리와 종교개혁 시대에 상당한 개혁세력을 구축하며 역사 속에 등장한 재 침례파에서 그 영적 계승을 볼 수 있으며, 침례교도(浸禮敎徒)라는 공식 이름의 발단은 신약시대 초기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침례교 배경과 역사
그 근원과 시작이 어떠하든지 남들이 붙여준 이름을 갖게 된 침례교인은 처음부터 혹심한 박해를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 세계로 침례교인이 확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초기 박해 시기, 영국 침례교도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널리 알려진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을 비롯해 불후의 명설교자 스펄전 목사, 최초로 해외 선교의 횃불을 든 윌리엄 캐리, 미국 개척사에서 종교 자유를 위해 투쟁한 로저 윌리엄스, 유아세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버드대학교 초대 총장직을 물러나 추방된 헨리 둔스터 등이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政敎分離) 정신으로 제퍼슨이 초기 미국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 침례교회는 미국 건국과 더불어 박해에서 벗어나 크게 성장했다. 현재 미국 남침례교단은 단일 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기도하다.
지난 세기 세계적인 전도자로 명성을 날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대통령 재직 중에도 교회학교 교사직을 고수하고 대통령 퇴임 후 더 활발히 활동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바로 침례교인이다.
현재 전 세계 침례교 통계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회 수가 15만 8000여 개, 등록교인 수는 대략 1억 5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침례교회 역사
한국 침례교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에서 온 독립 선교사 말콤 펜윅(Malcom C. Fanwick)의 선교에서 시작한다.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강력한 영적 경험을 토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그는,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 신학교육을 받은 후 돌아와 평안북도 원산을 중심으로 복음 전도와 전도자 양성에 힘썼다.
1901년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펜윅 선교사는 미국 보스턴 침례교회 소속 엘라싱 기념선교회 선교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를 인수받아 활동적인 순회 복음전도활동을 펼쳤으며, 그 결과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경상도 북부 지역에 31개 침례교회가 설립됐다.
1921년 일제강점기에는 동아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꿔 만주, 시베리아, 간도 등에 많은 선교사와 순회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 시기에 교단은 이미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모두 복음 전도에 힘쓰다 해난사고로, 공산당에, 또는 일제 밀정으로 오인되거나 몽골 토족의 습격으로, 또는 일제 박해로 순교했다.
특히 1925년에는 총회가 일제하 학교 교육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일제의 황궁요배(皇宮遙拜)와 신사참배에 불응하여 갖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다. 1941년 ‘원산 32인 사건’은 교단에서 발행한 성경을 불온문서로 취급한 일제에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이종근(당시 총회장) 감목(監牧)을 위시해 교역자 32명이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마침내 1944년 5월 10일 일제는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통계로 한반도와 만주, 간도 지역에 26개 구역(현 지방회) 400여 개 침례교회가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교단은 재건에 나서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선교협정을 맺어 오늘에 이른다.
침례의 의미
침례교에서 특별히 세례(洗禮)가 아닌 침례(浸禮)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 속의 의식이 침수례(浸水禮)라고 믿기 때문이다. 침례교회는 신약 성서에 따른 교회를 회복하려는 열정이 강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교단이 신약 성서에 따른 교회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침례교회가 침수례(浸水禮)를 고집하는 것은 성서에 따른 올바른 의식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은 구원론에서는 크게 개혁을 했지만, 교회 정치 체제나 의식 면에서는 가톨릭과 완전히 획을 긋지 못했다.
침례교회는 이런 비성경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좀 더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교회를 세우려는 열정이 그 어느 교단보다 강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침례교회가 세례받은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침례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려면 침례받을 것을 기본적으로 요구할 뿐이다.
이같이 침례교단은 신약시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온 역사적 근거가 있으며, 좀 더 성경의 내용에 맞는 교회를 세우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함께 교회를 이끌어가는 회중(會衆) 정치를 지향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