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0-18 13:16:18 ]
추기경들의 부패가 날로 심각해지며 분열 가속화
가난한 백성들은 참다운 성직자를 갈망하게 되다
역병이 지나가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을 질질 끌고 있었고, 교회에는 여전히 부패가 세도를 부렸다. 이때 이탈리아의 순결한 신비주의자 시에나 캐서린(Catherine of Sienna)이 아비뇽에 유폐한 교황의 로마 복귀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교회가 차지한 위치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캐서린은 16세기에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해 동안 기도하며 금식한 후 환상을 보았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고 자기에게 명령하셨다고 믿었다. 그리고 교리적인 오류를 피하고자 도미니크파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흑사병이 다시 시에나에 발발했을 때에도 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1370년, 캐서린은 또 다른 환상을 보았다. 그녀의 새로운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황을 설득하여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교황에게 “존경하는 아버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소서!”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동시에 유럽 전역에 다니며 ‘아비뇽의 죄’를 규탄하는 설교를 했다.
1377년, 드디어 캐서린의 꿈이 실현됐다. 교황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로마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 내적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 11세가 죽었을 때, 대부분 추기경이 프랑스 사람을 교황으로 세우기 원했으나, 군중은 교황청 밖에 모여 “로마인! 로마인! 우리는 로마인을 원한다!”고 소리를 질러 댔기 때문이다.
추기경들은 군중을 속이려고 평범한 로마 시민에게 교황의 옷을 입혔지만,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이에 성난 군중이 구호를 바꿔서 “추기경들을 죽여라!”고 외쳤다. 추기경들은 군중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사람 우르반(Urban) 6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교황 우르반 6세가 친(親) 프랑스파 추기경들을 돕지 않자, 추기경들은 이전 결의를 철회하고 아비뇽에서 프랑스인으로 새 교황을 선출했다. 그러나 우르반 6세는 물러나지 않았다. 교황 선출 문제로 가져온 이 대분열로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 두 명이 양립하는 기이한 시대가 40년 동안 지속했다. 동서로 분열한 교회가 이번에 또다시 로마와 아비뇽으로 나뉜 것이다.
피사 공의회의 결정
1409년, 아비뇽과 로마의 추기경들이 교회 분열을 종식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공의회를 열고, “교회의 하나 됨이 교황의 하나 됨에 좌우하거나 그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이는 곧 교황이 있어야만 교회가 통일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교황이 없어도 교회 공의회가 모든 교회를 총괄하는 통일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피사 공의회는 아비뇽과 로마에 있는 교황 두 명을 거부하고 로마 사람을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 교황들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교황이 두 명이라는 것도 문제였는데 이제 세 명이라니! 그것은 재난과 다름없었다. 교황 세 명은 서로 다른 두 교황을 추종하는 무리를 가차 없이 파문했다. 유럽 전역 성직자와 평신도는 어느 것이 진정한 교회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참된 교회는 어디에
그런데 전혀 뜻밖의 사람이 그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철학교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직 참된 교회만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그것에 동의했지만, ‘교회’라는 단어를 완전히 새롭게 정의했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교황이나 성직자나 성례전(聖禮典, 교회의식)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한 모든 신자를 교회(敎會)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위클리프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 사람의 경건한 생활이 입증한다고 대답했다(약2:18).
위클리프는 모든 교회 교인이 성경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추종자들이 성경을 읽기 쉬운 영어로 번역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위클리프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언어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고 기록했다.
이런 그를 혹자는 영웅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그들은 그를 두 차례나 법정에 세우려고 했지만, 정치적인 문제와 자연재해로 재판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는 1384년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이 성경 번역을 완료했고, 모든 영국 시민에게 위클리프의 개혁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가난한 설교자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적대자들은 그들을 ‘롤라드(Lollard, 위클리프파 교도, 네덜란드어로 ‘웅얼거리다’, 라틴어로는 ‘독초’라는 의미다)’라고 불렀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