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1-22 15:54:34 ]
종교회의 재판 후 죽을 뻔했으나 극적으로 구조
교회 갱신 위해 노력했으나 다 이루지는 못해
1521년 4월 15일 보름스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 주교가 바닥에 쌓인 책더미를 가리키며 마르틴 루터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것을 썼소?”
루터가 대답했다.
“내가 쓴 것이 맞소!”
“그러면 이 책들과 관련하여 당신의 입장을 변론해 보시오.”
주교의 요청에 루터는 평소처럼 도전적으로 말하는 대신 낮게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그리고 다음 날. 주교는 이번에도 똑같은 요청을 했다. 루터는 땀에 젖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포로가 되었소.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단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
마르틴 루터는 후스와 똑같은 운명을 맞을 뻔했다. 그러나 작센 지방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그를 보호하려고 비밀리에 병사를 파견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오던 루터의 마차를 병사 5명이 공격, 루터의 눈을 가린 채 버려진 어느 성으로 그를 데려갔다. 루터의 목숨을 구하려고 일부러 그를 납치한 것이었다.
수녀와 결혼한 루터
루터는 10개월 동안 숨어 지냈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동안 시토파 수녀 12명이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 수녀원을 떠나고자 했다. 당시에는 수녀를 수녀원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중죄에 해당했으므로, 루터의 친구 하나가 청어를 담는 큰 통에 수녀들을 담아 마차에 싣고 수녀원 밖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수녀 12명 가운데 8명은 결혼했다. 3명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붉은 머리에 공격적인 성격을 지닌 26세 처녀 캐서린만 남았다.
1522년 4월, 캐서린은 루터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그때 루터는 42세였고, 결혼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낭만적인 이유 세 가지를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첫째,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으며, 교황을 약 올릴 수 있고, 후사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결혼을 준비하며 “프랑스를 다 준다고 해도 캐서린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주셨고 다른 여자들은 훨씬 더 결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루터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여섯 명을 사랑했다. 심지어 그는 갈라디아서(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에 ‘나의 캐서린’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웃에서 이 위대한 종교개혁가가 빨랫줄에 기저귀를 너는 모습을 보고 실소할 때, 그는 “비웃을 테면 비웃으라지. 하나님과 천사들은 미소를 지을 거야” 하고 말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시지?
루터가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 예배당 문에 못 박은 직후, 스위스 취리히 시민도 교회의 가르침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도자인 가톨릭 성직자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사순절(四旬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야까지 40일을 탄식과 참회의 기간으로 정하고 술과 육신을 금하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했다) 동안 소시지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것은 교회의 갱신을 위해 운동하는 개혁가가 2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루터를 추종하던 독일인 한 사람이 루터와 츠빙글리가 공조하면 이 개혁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커지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두 사람에게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한 가지 쟁점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운동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 쟁점이란,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에 어떤 방식으로 임하시느냐는 것이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화체설(化體說, 성찬식 때 먹는 빵과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학설)이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지만, 성경적 대안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루터는 주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라는 가시적인 요소 안에 임재하며 이 몸의 임재가 하나님과 화해한 모든 신자에게 은혜를 가져다준다(이를 공재설(共在說)이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그게 아니라면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단지 “이것이 내 몸을 상징한다”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마르부르크에서 츠빙글리를 만난 루터는 호주머니에서 분필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연회 탁자 위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 즉 “이것이 내 몸이다” 말씀을 또박또박 썼다. 그로부터 닷새 후, 양측은 다시 만났지만 서로 입장을 굽히지 않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마르부르크 회담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몸으로 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쟁점에서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양심이 허락하는 대로 입증할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끝이 났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