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28>] 종교 개혁가들의 태동과 발자취

등록날짜 [ 2011-11-29 13:45:51 ]

개혁의 단계는 미완성… 유아세례 거부로 박해받는 침례교인
츠빙글리의 제자 펠릭스 만츠 비(非)가톨릭 신자로 최초 순교

1534년, 또 다른 변호사가 들판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지만 루터처럼 벼락을 맞아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파리 대학을 떠나 스위스로 도피하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존 칼뱅(John Calvin)이었다.

몇 개월 전, 칼뱅은 친구 한 명의 연설문 작성하는 것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루터와 에라스뮈스의 말에서 빌려 온 인용구들로 연설에 양념을 쳤다. 하지만 이 일로 프랑스 정부의 분노를 사 급기야 도피 길에 오른 것이다. 칼뱅은 곧 크리스천이 됐고 개신교 신자가 됐다.

처음에 칼뱅은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노용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다시 스위스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개신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를 저술했다.

고향에는 언제 갈 수 있는 거지?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후, 스위스 개신교도의 도시 스트라스부르크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던 도중 전쟁이 일어나 제네바를 거쳐 동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네바에 딱 하룻밤만 머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하루가 그의 평생이 되고 말았다.

제네바에서는 ‘파렐’(Farel)이라는 설교자가 이미 개신교 사상을 전하고 있었다. 이에 칼뱅 친구 한 사람이 파렐에게 칼뱅이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라고 말했다. 그날 밤 파렐은 여관에서 칼뱅을 만났고, 칼뱅은 거절할 수 없는 요청으로 제네바에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제네바 모든 크리스천이 칼뱅이 주장한 개혁 비전에 찬동했다.

그러나 2년 후, 여러 정치적 종교적 논쟁이 벌어진 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제네바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칼뱅은 원래 행선지인 스트라스부르크로 피했고, 거기서 자신처럼 박해를 피해 도피한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 Huguenots, 16~17세기 프랑스 개신교 신자)를 돌보았다. 칼뱅은 그가 늘 갈구하던 학문을 위한 평온함을 그곳에서 찾았다.

종교 개혁자가 원한 것은 단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칼뱅 역시 루터나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국가가 서로 섞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네바 시 정부는 시민에게 제네바교회의 신앙을 강요했고, 1553년에는 삼위일체를 부정한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트수(Michael Servetus)를 화형에 처했다.

그런데 츠빙글리가 활동하던 취리히에서 가히 급진적이라고 할 만한 운동이 일어났다. 츠빙글리의 제자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친구들(이들도 츠빙글리의 제자였다)과 함께 이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어떤 정부도 신학적 진리를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취리히의 성직자들은 여전히 라틴어로 주의 만찬을 베풀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그들은 대중들의 언어로 주의 만찬을 베풀라고 촉구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주의 만찬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셨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츠빙글리가 이 문제를 취리히 시 정부에 넘겼다. 그러나 펠릭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것이 정부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이 성경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여겼다. 펠릭스 만츠는 자신의 집에서 주간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펠릭스와 그 ‘스위스 형제들’(‘스위스 형제단’이라고도 한다)은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신약성경이 유아세례를 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1524년, 이로써 ‘스위스 형제들’은 유아세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525년 1월, ‘스위스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친구들에게 “참된 크리스천의 침례를 베풀어주게!” 하고 요청했고 이에 형제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머리에 물을 부었고, 펠릭스를 포함한 형제들 모두 ‘믿는 자의 침례’(유아세례에 반대되는 개념)를 받았다. 그들은 이 혁명적인 행위로 ‘다시 침례를 받은 사람들’ 혹은 ‘재침례파’(Anabaptists)라고 불리게 된다.

그날 밤, 취리히 시의회는 재침례파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가까운 마을로 도망쳤지만 무사히 달아나지는 못했다. 펠릭스 만츠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5개월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지만 1526년 10월에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기소장에는 “피고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는 사람들을 모으려 했으며… 침례를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려고 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펠릭스 만츠는 야만적인 조롱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형 집행관들이 그의 양손을 등 뒤로 묶은 다음 얼음이 언 차가운 강에 그를 밀어 넣은 것이다. 그는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 하고 주를 찬양하며 죽었다.

펠릭스는 개신교도에 순교당한 최초의 비(非)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 순교자는 아니었다. 재침례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가 급속히 확산했기 때문이다. 이때 재침례파의 진실한 교사와 지도자들이 개신교회에 의해 수없이 희생당했고, 그로 말미암아 재침례파 교인 가운데 이단들이 잡초처럼 무성해졌다. 이 이단들이 재침례파의 역사를 비극적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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