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0-28 02:22:17 ]
신학자는 체험도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백성은 신비주의 사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유럽 대륙으로 급속히 확산해 1400년대 초에는 보헤미아(Bohemia, 오늘날 체코슬로바키아)에 이르렀다.
보헤미아 주교는 위클리프의 책을 읽지 못하게 했으나, 교수이자 성직자인 얀 후스(Jan Hus)는 그전에 이미 위클리프의 책을 여러 권 접했다. 결국 후스는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좇아 목숨을 바쳤다.
후스는 프라하 강단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외쳤다. 그러자 1407년, 보헤미아교회가 그의 설교권을 박탈했다. 하지만 후스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주장이 오직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할 때에만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주의 만찬 때에 평신도에게 잔을 돌리지 않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처음에 보헤미아 왕은 후스를 지지했지만, 정치적으로 교황의 후원이 필요했기에 결국 후스를 유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1415년, 신성로마제국 황실 전령 한 사람이 후스를 발견하고 독일 콘스탄츠 시에서 열리는 교회 공의회에 나가 변론하라고 설득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후스가 안전하게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후스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추기경들은 황제가 그 약속을 지키게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후스를 콘스탄츠 근처에 있는 어떤 성에 감금했다.
그런데도 후스는 급진적인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회유를 권유하는 무리에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호소할 것이다. 그분이 거짓 증인이나 부정한 조언자들의 말을 근거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진리와 정의를 근거로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1415년, 7월 6일 추기경들은 사단을 그려 넣은 종이 모자를 후스의 머리에 눌러 씌웠다. 그릇된 신앙을 지닌 사람을 교회가 나서서 처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후스를 국왕 병사에게 넘겼다. 병사가 후스를 기둥에 묶고 화형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후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간절히 구하오니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시편을 찬양하며 불에 타 죽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더 나아가 피사 공의회가 임명한 새 교황을 투옥하고, 로마에 있는 교황을 폐위했으며, 아비뇽에 있는 교황을 은퇴시킨 다음, 마르틴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교황 선출을 둘러싼 대분열은 1450년경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이때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은 시민의 진실한 필요에 무관심했다. 많은 신학자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공동생활 운동
1347년경,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던 네덜란드 몇몇 크리스천이 과거 교회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들을 돌아보았고, 그들 중에서 새로운 형태의 신앙, 즉 ‘공동생활 운동(그들이 조직한 신앙공동체를 ‘공동생활 형제단’이라 불렀다)’이 일어났다. 그들은 주교와 성직자의 부패를 비난하고 고발했지만, 교회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형제자매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과 심오한 학문을 결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헌신을 강조하며 이를 ‘오늘의 헌신’이라 일컬었다. 공동생활 운동의 가장 유명한 일원이 토머스 아켐피스다. 그는 공동생활 운동 이념을 다듬고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불후의 명작을 저술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수많은 크리스천이 이 책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운다.
프랑스 여인 잔다르크 등장
이때 프랑스 젊은 여성 신비주의자 한 명이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정치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 체험에 대한 해석 때문에 그녀는 목숨을 잃는다.
1415년, 영국 국왕 헨리 5세가 아쟁쿠르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여 프랑스 북부를 점령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잔이라는 프랑스 소작농 여성 한 명이 환상을 보았다. 그녀는 천사장 미가엘과 성자 두 명이 영국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라고 자신에게 명령했다고 믿었다. 그녀는 잔 다르크라고 알려졌다.
영국에서는 초자연적 현상을 보았다는 그녀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 편이라고 주장했는데, 잔 다르크의 환상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를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1430년 5월, 잔 다르크가 부상을 당해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영국 군대에 체포됐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은 그녀의 몸값을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비천한 농부의 딸 덕분에 왕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끔찍했고, 한편으로 백성이 그녀를 따르는 것이 몹시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결국 1431년 5월, 19세 소녀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하고 죽고 만다. 당대 영국과 프랑스의 수많은 시민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나라의 정치적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신다고 믿었다. 그녀의 죽음은 하나님의 길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대대적인 오해가 불러온 슬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계속>
<사진설명> 잔 다르크
위 글은 교회신문 <2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