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25>] 이교도에 짓밟힌 하나님의 성전

등록날짜 [ 2011-11-08 14:06:45 ]

이슬람교도 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 점령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자는 운동 본격화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제국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그리고 1453년경, 콘스탄티노플은 고대 동방제국의 모든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가 됐다. 그런데 1453년 5월 28일, 오스만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를 완료했다.

그날 저녁,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소피아 성당(터키 이스탄불)에 모였고, 로마 주교 몇 사람도 동방정교회 형제자매와 명멸하는 촛불 아래 무릎을 꿇었다. 고대부터 골이 깊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잠시 잊고 로마와 동방 크리스천이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피아 성당 예배당에서 울려 퍼진 크리스천의 마지막 예배였다.

5월 29일, 이슬람교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날 저녁, 이슬람교 지도자 한 사람이 소피아 성당 제단에 올라가 “하나님은 없고 오직 알라만이 존재한다. 모하메드는 알라의 선지자다” 하고 노래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이 이슬람 사원이 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그 건물은 1930년대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이때 수많은 동방 학자가 이슬람교도를 피해 서방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가장 값진 재산인 고대 그리스의 사본들을 서방으로 가져갔다. 로마 크리스천이 고대 저작에 무관심했던 것과 달리 동방 크리스천은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 동방에서 건너온 고대 문서들은 고대 그리스 수사학과 예술과 저작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운동, 즉 르네상스 운동을 서방에 불러일으켰다.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 예술처럼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묘사했고, 르네상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웅변가들처럼 실제적인 언어와 행위를 강조했다. 직선적이고 통렬한 말들이 스콜라 철학의 정확한 논리보다 더 중요해졌다. 그들은 스콜라 철학의 공리공론보다 실제 인간 행위에 더 지대한 관심을 뒀기에 ‘인문주의자’(humanists)라고 불렸다.

크리스천 인문주의자는 이런 사조(思潮)를 성경에 적용하여 성경 본문의 원어적 의미와 원래 취지를 탐구했다. 그들은 “원전으로 돌아가자!”를 구호로 삼았다. 이 회복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데는 요한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라는 인쇄업자가 큰 몫을 담당했다. 1453년,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 주조법을 발견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책을 대량 생산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책값이 폭락했고 성경은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작들이 유럽 사회에 홍수처럼 넘쳤다.

교황들은 르네상스 예술과 고대 문헌 편찬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는 무관심했다. 로마 주교들은 여전히 부패했고, 면죄부 판매는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유지됐으며,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교회 권력을 이용하여 무수한 이슬람교도와 유대인과 이단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누가 보더라도 개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앞을 지향한 종교개혁가, 에라스뮈스
이때 젊은 인문주의자 한 사람이 교황과 기쁨을 나누지 않았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는 교황을 가리켜 “이 사람이 누구의 후계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인가?” 하고 물었다.

에라스뮈스의 아버지는 성직자였지만 결혼하지 않고 아들을 낳은 호색한(好色漢)이었다. 에라스뮈스는 어린 시절 ‘공동생활 형제단’ 형제들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그리스어에 남다른 호기심을 보였다. 10대가 되었을 때, 그는 대학에 들어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 공부를 택했고 성직자가 됐다. 에라스뮈스는 성직자인 동시에 가능성이 많은 뛰어난 학생이었다. 주교는 그를 파리 대학으로 보내 그리스어를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이를 계기로 이제 막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젊은 인문주의자는 유럽 전역을 다니며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뮈스가 당당히 볼로냐로 입성하는 교황 율리우스 2세를 목격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에라스뮈스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교황이 세상 군대를 이끄는 장면을 목격한 뒤, 교회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공리공론을 조롱하며 “사도 바울은 사랑의 예(例)를 보여주었지 그것을 논리적인 원칙에 따라 나누지도, 정의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거룩한 전쟁(십자군 전쟁)’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이슬람교도 또한 인간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에라스뮈스는 이처럼 통렬히 교회를 비판했지만,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변하길 원했다. 이 충직한 로마 가톨릭교도는 얼마 후 그리스도의 몸에 급진적인 개혁을 가져올 ‘도구’를 만들었다. 바로 1516년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이 사도들의 말을 사도들이 사용한 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중대 사건이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
1517년, 로마 가톨릭교회는 적막하리 만큼 고요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새로운 교황 레오 10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황 제도를 주셨으니 마음껏 누리자!”고 선언하며 새 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나무통에 화약을 채웠고, 에라스뮈스가 도화선이 되었으며,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격앙된 수도사 한 사람(마르틴 루터)이 이 도화선에 불을 붙여서 유럽 대륙을 온통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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