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29>] 개혁 속에서도 박해는 계속되다

등록날짜 [ 2011-12-06 13:39:00 ]

목숨보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한 침례교도의 믿음
모든 이가 성경을 읽도록 쉬운 영어로 번역 작업

뮌스터 학살
어느 날, 독단적인 성경학자 한 사람이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고, 제법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집단 주거지를 만들어 그곳에 기거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추구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가 마을을 포위하여 식량 유입을 차단하고 마을을 고립시켰다. 군인들의 기습 공격으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지도자들이 살해당하며 그들의 운동도 끝나고 말았다.

귀에 익은 이야기 아닌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1993년이 아니었다. 장소도 텍사스의 와코가 아니었다(1993년, 광신자 89명이 사망한 텍사스 와코 집단자살 사건을 가리킨다). 때는 1553년이었고 장소는 독일 뮌스터, 진압 대상은 재침례파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다.

뮌스터 학살 이후,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국왕들은 야만적으로 재침례파를 탄압했다. 심지어 칼뱅도 통치자들에게 재침례파를 박멸하도록 촉구했다. 칼뱅은 “지금 두세 사람을 화형에 처하는 것이 나중에 수천 명을 지옥 불에 떨어뜨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오직 에라스무스만이 재침례파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따를 권리가 있다고 옹호했다. 1600년 초만 하더라도 가혹한 탄압으로 죽은 재침례파 사상자의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라는 네덜란드의 설교자가 나타나 재침례파를 멸절의 위기에서 건져냈다.

박해 중 평화
메노 시몬스는 1524년에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직무를 수행하고 월급을 받으면서도 한 손에는 맥주잔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도박판을 벌이며 대부분의 저녁시간을 술집에서 보냈다.

이렇게 2년간 방탕한 생활을 한 메노가 다른 목회자들에게 감명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생전 처음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가 성경공부를 시작한 동기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진리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10년 후, 그는 안락한 생활을 뒤로하고 재침례파에 들어갔다. 그는 ‘재침례파’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재침례파 목사의 유일한 사례금은 불과 검과 죽음뿐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메노는 뮌스터 학살 이후 재침례파 사상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던 쓰레기 이단 교설에서 두 가지 신념을 굳게 지켰다. 그 두 가지 신념이란 첫째, 교회가 (유아가 아니라)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하며, 둘째, 어떤 정부도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메노는 재침례파 교도에게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메노 시몬스는 신약성경의 양식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주의 만찬 의식을 거행할 때에는 신도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메노의 추종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순종했으므로 싸우지도 않았고 맹세하지도 않았다(마5:33~39).

1542년, 메노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긴급수배자 명단에 첫째로 올랐다. 메노와 그의 가족은 이를 피해 19년간이나 도피생활을 했다. 그로 말미암은 중압감으로 많은 희생까지 치렀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메노 자신도 다리를 절게 되었다. 메노 시몬스는 1561년에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16세기 재침례파 교도 가운데 극소수만이 누린 특권 중의 특권이었다. 메노 시몬스가 재침례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따라서 그들은 ‘메노의 사람들’ 혹은 ‘메노파 교도(Mennonites)’라고 알려졌다.

영어 성경 번역 작업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그리스어’ 그리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사랑에 빠진 학생이 하나 있었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이 사랑 때문에 결국 목숨을 바치게 된다.

틴데일은 어느 부유한 일가의 목사가 되는데, 연회 중 한 성직자와 성경의 의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그 성직자가 먼저 “교황의 법이 없이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법이 없이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틴데일이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연장해 주신다면, 두메산골 촌뜨기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하고 쏘아붙였다.

틴데일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쉬운 영어로 번역하기 원했지만, 그의 주교는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틴데일은 주교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성경을 출판하기 위해 독일의 보름스로 피신했다. 1526년 보름스의 한 인쇄업자가 그가 번역한 영어 신약성경을 6000부 인쇄했다. 그리고 3개월 후, 그의 신약성경이 영국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영국의 주교들은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대량으로 구입해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이 ‘성직자 방화범’들도 틴데일을 꺾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국의 주교들이 대량으로 신약성경을 구입하자 그로 말미암아 틴데일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벌어들인 그 돈으로 다시 개정판을 펴냈기 때문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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