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30>] 영국에서 일어난 어중간한 종교개혁

등록날짜 [ 2011-12-13 13:27:31 ]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 종교분쟁 일어나자
엘리자베스, 성공회 세워 ‘중도노선’ 표방

종교개혁이 발발하기 전, 영국의 군주들은 대체로 교황을 지지했다. 그리고 1520년, 마르틴 루터를 공격한 소책자 한 권의 표지를 보면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이름이 저자(著者)로(실은 그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가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자랑스럽게 올라 있다. 교황 레오 10세는 헨리의 열정을 치하하며 ‘교회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마 그는 이 교회의 수호자가 나중에 교회의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교회의 머리다
헨리 8세는 스페인 공주였던 형수 캐서린을 왕후로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헨리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지 못했고, 헨리는 이미 궁녀 출신인 매력적인 25세 처녀 앤 볼린(Anne Boleyn)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위기 20장 21절에 근거, 하나님께서 캐서린에게 아들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녀와 한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1529년, 헨리는 ‘스페인 계집’에게 맹세한 것을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가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찰스 5세가 바로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클레멘트 7세는 아내를 버리는 일에 협조해달라는 헨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헨리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획기적 사건이 필요했다. 그의 필요를 충족해준 사람이 바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1532년 4월, 크롬웰은 대신회의를 주도하여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신(神)의 대리자인 국왕이 통치하는 독립적인 교회가 됐다고 선포했다(이렇게 해서 ‘영국국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듬해, 영국의 새로운 대주교로 임명된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헨리의 결혼서약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헨리는 앤 볼린과 결혼하게 됐고,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首長)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대법관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국왕인 헨리가 영국 교회를 통치하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그는 “대법관 모어(More)가 이제 더는 (no more) 대법관이 아니다”라고 한 어릿광대의 말처럼 자리에서 물러났고, 얼마 후 헨리의 충직한 부하 토머스 크롬웰에게 참수를 당했다.

주여, 영국 왕이 눈을 뜨게 하옵소서!
그런데 헨리 8세의 결혼 문제가 윌리엄 틴데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1539년. 틴데일은 소책자를 펴내어 캐서린을 버리려는 헨리를 호되게 비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왕실의 병사에게 체포됐고, 목이 졸린 다음 화형을 당했다. 틴데일은 “주여, 영국 왕이 눈을 뜨게 하옵소서!” 하고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틴데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1538년, 헨리가 틴데일 성경의 완결판인 「매튜 성경(Mattew’s Bible)」을 승인했고, 그 이듬해에는 매튜 성경의 증보판인 「대성경(Great Bible)」을 영국의 모든 교회에 비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로써 영국의 종교개혁이 완결한 것은 아니었다. 1541년,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무어(Jane Seymour)가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의 후원 아래 토머스 크랜머가 「공중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펴냈다. 이 대중적인 예배 지침서는 장황하고 복잡한 라틴어 예배를 간략한 영어로 바꾸어 놓았고,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553년에 헨리의 아들이 12세라는 어린 나이로 죽고, 헨리가 캐서린에게 낳은 딸 메리 튜더(Mary Tudor)가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영국을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신자 300명 이상을 처형함으로써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토머스 크랜머와 휴 라티머(Hugh Latimer) 주교도 이때 희생됐다. 화형대 위에 올라선 라티머 주교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덕택에 절대로 꺼지지 않을 촛불로 이날을 밝힐 것이다” 하고 선언했다.

‘피의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 헨리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이 낳은)은 영국 교회를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점(의례는 가톨릭, 신학은 개신교를 따르는)에 갖다 놓았다.

그녀는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국왕들이 받던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칭호를 거부했고 교황의 권세도 거부했다. 그녀가 개정한 「공중기도서」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사상이 혼합해 있었다. 이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고수한 중도노선이 오늘의 성공회(혹은 영국 국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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