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31)]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분리

등록날짜 [ 2011-12-20 17:08:25 ]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도 쇄신 바람 불지만
형식과 권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전승돼

16세기 로마 가톨릭 크리스천 중에 오직 루터만 개혁을 꿈꾼 것은 아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예배당 문에 못 박기 몇 년 전에 가톨릭 지도자들 역시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 개혁자들은 그들의 원래 계획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로마 가톨릭 개혁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과 재결합하려고 노력했다.

가톨릭의 개혁
1541년, 마르틴 루터의 조력자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을 포함한 몇몇 프로테스탄트 개혁자가 독일의 라티스본-레겐스부르크에서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을 만났다. 재결합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두 집단의 재결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결합을 방해한 것은 칭의(Justification) 문제가 아니었다. 양측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죄인이 의로워지며, 구원의 믿음이 선행을 낳는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대표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교황의 권세를 인정하고 가톨릭의 성만찬 교리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두 진영은 라티스본-레겐스부르크 회담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갈라서기에 이른다.
또 그 순간을 기점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혁을 위해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이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라는 병사 한 명이 가톨릭 신앙을 대변하는 새로운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1521년에 참가한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는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침상에 누워 토머스 아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정독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아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 책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로욜라와 그의 친구 6명은 일평생 자선을 베풀며 가난하게 살 것이며 교황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로욜라의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승인하여 ‘예수회 수도단(Jesuit order)’이 형성되었다.

예수회는 곧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한 가장 강력한 선교 세력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일본과 인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150년 전에 예수회 성직자 프랜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가 두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예수회 성직자들이 보여준 개혁 정신으로 가톨릭교회 전체가 갱신을 향해 나아가게 됐다.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는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운동에 대응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트렌트(Trent)에 대표들이 모였고, 트렌트 공의회는 1545년에서 1563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변화시켰다. 면죄부와 성직 매매를 중단했고, 성직자의 금욕을 다시 강화했다.

또 트렌트 공의회는 여러 가지 교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교회 전통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부여했고,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과 행위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고 간주했다. 또 미사는 반드시 라틴어로 집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결정들이 앞으로 400년 동안 로마 가톨릭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여파
중세 유럽 시민은 대부분 그들의 사회가 로마의 교황 아래 하나로 결집한 기독교 사회라고 믿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그들은 “만일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형태의 기독교를 따른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질문했다.

1555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체결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Peace of Augsburg)’은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서로 평화롭게 존속할 수 있게 했다. 각 지역 제후는 백성의 신앙고백을 인정했고, 가톨릭을 믿는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에 사는 프로테스탄트 백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되었다(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칼뱅파, 츠빙글리파, 재침례파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종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16세기 말 유럽은 조각조각 분열됐다. 누가 이 조각들을 맞출 수 있을까? (계속)


(사진설명) 성 울리히 아프라 교회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구시가지 남쪽에 위치해 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의 개신교를 인정한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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