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1-03 13:37:03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갈등, 정치적 싸움으로 변질
갈등에 염증 느낀 성도들 신대륙과 네덜란드로 이주
종교개혁을 주도한 크리스천은 변하기를 원했고 또 실제로 변했다. 그러나 몇 가지는 갈등과 불화 그리고 혼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원한 것보다 더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구심을 표명하는 신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프라하의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치 영역에서 입지를 잃었다. 1618년 프라하, 일단의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교도가 가톨릭교도인 왕의 칙사들과 만났다. 하지만 왕의 칙사들은 프로테스탄트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시민은 성난 폭도로 돌변하여 회의를 무산시켰고, 왕의 칙사들을 2층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창가로 몰린 칙사 한 명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여! 도우소서!”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프로테스탄트교도 한 명이 “네 마리아가 너를 돕는지 보자!” 하고 고함을 지르며 그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런 다음 창밖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은혜로 네 마리아가 너를 도왔구나!” 하고 외쳤다.
다행히 그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불행하게도 말똥 더미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프로테스탄트에 전쟁을 선포했다. 역사가는 말똥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사건을 ‘프라하의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라고 명명했고, 그 결과로 일으킨 갈등을 ‘30년 전쟁’이라고 불렀다.
처음 갈등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한 전쟁 양상이었다. 하지만 곧 정치적 충돌과 무의미한 약탈이 전개되었고 결국 프랑스, 덴마크, 신성로마제국 전체가 휩쓸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만 1000만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끝이 난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이 국제적인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 교황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종교적 갈등에 신물이 난 유럽 시민도 그들의 사회를 견고히 결속해줄 무엇, 기독교가 아닌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영국국교회에서 나뉜 청교도와 침례교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영국도 나름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1604년, 일단의 개혁자들이 햄프턴 궁전에서 영국 왕 제임스 1세를 만났다. 이 개혁자들은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아무도 창밖으로 내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영국 교회를 정화하기(purify)만을 바랐다. 따라서 그들은 ‘청교도(Puritans)’라고 알려진다.
그렇다면 청교도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사회 비평가는 ‘청교주의(Puritanism)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언젠가 행복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망령 같은 두려움이다’고 논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우중충한 옷을 입고 예배를 드렸다. 우울해지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화려하고 말끔한 옷을 차려입었을 것이다.
청교도는 맥주를 즐겨 마셨고, 배우자와 만족스러운 잠자리를 원했고, 스케이트를 탔으며 수영, 사냥, 볼링을 즐겼다. 그들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실하게 사귀는 것으로 믿음을 표현했다.
또 그들은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성경 말씀에 없는 모든 관행을 교회에서 없애고 정화하기 원했다. 그들은 제임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서 “인간이 고안해낸 것으로 교회를 다스리면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법과 규칙에 따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하고 주장했다.
청교도는 제네바 성경 번역본을 선호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칼뱅주의자가 제네바 성경 번역본에 달아놓은 연구 주(註)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604년 햄프턴 궁전 회의에서 청교도가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자고 제안했을 때 이에 즉각 동의하고, 학자 44명을 소집하여 33개월 동안 성경을 번역하게 했다. 이로써 1611년,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 줄여서 KJV, 흠정역(欽定譯)이라고도 함) 제1판을 출판했다.
그러나 영국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새로운 성경 그 이상이 필요했다. 햄프턴 궁전 회의가 끝난 후, 몇몇 청교도가 영국국교회에서 분리됐다. 소위 ‘분리파(Separatists)’라고 불리는 그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1607년에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안전을 꾀해 자신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것이다. 두 집단은 각각 길을 걸으며 세상을 변하게 했다.
한 집단은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신대륙에 당도한 뒤 매사추세츠에 정착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순례 태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네덜란드에 남은 집단은 교회를 변하게 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존 번연(John Bunyan),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이 그들의 전승자다. 바로 우리가 침례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계속>
<사진설명> 메이플라워호
위 글은 교회신문 <27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