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34>] 탄압 속에서 탄생한 침례교

등록날짜 [ 2012-01-10 13:57:03 ]

청교도운동 이후 영국에서 침례교회 처음 세워져
존 번연, 모든 성도 참여하는 ‘주의 만찬’ 주장해

‘청교도(Puritans)’는 영국 교회를 정화하기(purify)만을 바랐다. 교회의 법과 규칙을 인간이 고안해낸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려 했다.

햄프턴 궁전 회의가 끝난 후, 몇몇 청교도가 영국국교회에서 분리했다. 소위 ‘분리파(Separatists)’라고 불리는 그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 1607년에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한 집단은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신대륙에 당도한 뒤 매사추세츠에 정착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순례 태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네덜란드에 남은 집단은 교회를 변하게 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최초의 영국 침례교도
네덜란드에 남은 그룹의 지도자는 존 스미스(John Smith)였다. 그의 이름은 평범했지만, 그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오직 ‘믿는 자의 세례’(‘유아세례’와 대조적인 개념으로서)만이 유효하다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믿는 자에게서 침례받길 원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정말 유아세례가 유효하지 않다면 그들 중 올바로 침례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셈이 되는데, 과연 침례 받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609년, 스미스는 모험을 감행했다. 스스로 ‘자기 몸에 물을 부은’ 것이다. 스미스의 ‘자기 침례’는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의 분리파 형제들’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켰다. 나중에 그들은 ‘침례교파’로 알려진다. 분리파 형제들은 그리스도 속죄의 일반적(보편적) 범위를 강조한 알미니우스 주의를 수용했는데, 이 이유로 나중에 ‘일반 침례교파(General Baptist)’라고 알려졌다.

1610년, 스미스는 ‘자기 침례’가 유효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고 재침례파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들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스미스의 절친한 친구 토머스 헬위즈(Thomas Helwys)가 교인들을 이끌고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런던 근처에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존 번연에게 넘치는 은혜
영국 침례교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이었다. 그가 9살 되었을 때,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가 영국의 모든 교회는 영국국교회의 의식을 따라야 한다고 명령했다. 당연히 영국국교회와 비국교회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정치 분쟁으로 비화되어 영국 전체가 순식간에 혼돈에 휩싸였다.

이때 영국 의회의 대신(大臣)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청교도를 지지하는 군대를 창설, 5년 내 영국을 장악했다. 크롬웰은 찰스와 그의 대주교들을 참수했다(청교도 혁명). 이때 16세의 번연은 크롬웰의 군대에 징집되었지만 2년간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부대는 해산하였다. 호국경(護國卿) 크롬웰은 이미 인기를 잃고 있었다.

1648년 즈음 번연은 결혼했다. 그는 신부를 위해 초가지붕 오두막을 지었지만 그 안에 들여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 그의 아내 메리가 혼수로 가져온 것이라곤 두 권의 청교도 책뿐이었다. 나중에 번연은 “가구는 고사하고 우리는 접시나 스푼도 없었다” 하고 말했다.

그가 가재도구를 구입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번연이 아내가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온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사화(Book of Martyrs)』와 다른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책은 번연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은 후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나중에 그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새처럼 한없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1653년, 번연은 베드포드(물을 붓는 대신 물에 들어가는 침례를 최초로 베푼 곳이 베드포드 침례교회인 것으로 보인다)의 한 침례교 목사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번연은 얼마 되지 않아 침례교 순회 설교자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번연은 다른 침례교 설교자와 달리 교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신자에게 주의 만찬을 베풀었다. 그는 “교회는 어떤 신자라도 주의 만찬에서 제외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논박했다.

1660년, 크롬웰의 공화정이 끝났다. 찰스의 아들은 왕정복고를 시도하며 비국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후, 존 번연은 영국국교회의 인가를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되었다.

그 감옥에서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 탄생했다. 1688년, 영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불과 몇 개월 전, 번연은 세상을 떠났다.

1688년, 오렌지 공 윌리엄과 그의 아내이자 제임스 왕의 딸인 메리가 영국의 새 통치자가 되었다. 그들의 명예혁명은 영국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중도 정책으로 돌려놓았다. 그들은 ‘관용령(Toleration Acts)’을 반포, 영국 의회가 정한 39개 교리조항에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예배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로써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은 끝났지만 그들의 이상(理想)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속에 남아 존속했다. 그리고 무법천지인 식민지 미국에서 청교도들의 꿈이 실현되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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