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1-26 15:48:03 ]
신앙의 자유 찾아서 떠난 청교도
결국 자유라는 덫에 빠지고 말아
1600년대와 1700년대 많은 사람은 부모의 신앙이 더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도 ‘창의적인 장소 변화’를 시도했다. 이른바 청교도와 애국자들은 새로운 사회 속에서 영감을 발견했고, 경건주의자는 신앙의 부흥을 탐색했고, 합리주의자는 신(神)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품었다. 그 결과 일련의 혁명이 발생했고, 그것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 혁명
1620년, 영국 분리파 교도 102명과 그들을 호위하는 군대가 고향을 떠났다.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식민지를 건설했다.
메이플라워 호의 항해는 ‘질리건 섬(Gilligan's Island, 미국 1960년대 TV 시리즈, 외딴 섬에 고립한 인간을 소재로 했다)’ 첫 부분과 유사했다. 청교도는 버지니아에 상륙하기를 원했지만 폭풍과 항해 실수로 목적지에서 북쪽으로 밀려가 매사추세츠에 상륙했다. 그들은 상륙한 지점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이름 붙였다.
몇 해 후, 청교도가 매사추세츠 베이에 건설한 식민지가 플리머스 식민지를 흡수했다(청교도가 신대륙으로 건너온 최초의 유럽인은 아니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유럽인이 간헐적으로 신대륙에 건너와 식민지를 건설했다).
두 집단 중 어느 집단도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념을 근거로 한 사회를 건설하기 원했다. 그런데 청교도의 실험이 몇 해 동안 실효를 거두었다. 그들은 누구든지 투표권을 획득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시인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식민지 정착민은 그 요구를 착실히 따랐다. 이런 식으로 사회와 교회는 긴밀히 연결됐다. 하지만 이런 절충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로저 윌리엄스의 특별한 식민지
식민지와 교회의 이런 유착을 최초로 문제 삼은 사람이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라는 분리주의자였다. 그가 매사추세츠에 도착했을 때, 청교도 조합교회(회중교회)는 그에게 목회자를 가르치는 교사 직위를 제안했다.
하지만 로저는 다른 청교도와 달리, 판사가 시민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원주민에게 설교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식민지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그가 “미국 원주민이 이 땅의 진짜 주인이다” 하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1635년, 매사추세츠 법원은 로저를 추방했다. 당시 그의 딸은 두 살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지만 로저에게는 말(馬)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떠나야 했다. 그는 14주 동안 북풍이 몰아치는 동부 황야를 터벅터벅 걸었다. 마침내 원주민 부족이 그에게 쉴 곳을 제공했다.
이듬해, 로저는 원주민 부족에게 적절한 대금을 지불하고 매사추세츠 남쪽에 있는 작은 분지를 매입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 몇몇 친구가 그곳에 모여 함께 살았다. 로저는 자신의 작은 땅 뙈기를 ‘프로비던스(Providence, 오늘의 로드아일랜드)’라고 불렀는데 이 프로비던스에서는 모든 종교가 환영을 받았다.
로저는 스스로 만든 헌장에서 “프로비던스 내에 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종교에 관한 다른 견해로 소추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종교와 관련하여 마음대로 판단할 자유가 있다” 하고 선언했다.
로저는 프로비던스를 설립한 지 3년 후 신대륙 최초 침례교도가 되어 식민지 사회에 최초로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8개월 후 침례교 신앙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다시 식민지 최초로 ‘이전에 침례교 신자였던 사람’이 되기도 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