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1-19 16:45:08 ]
아메리카로 첫 이주 후 기독교인 대거 진출
복음 전도를 빙자해 노예제와 약탈 일삼아
유럽 대륙이 종교 전쟁으로 변화를 겪는 동안 지구의 또 다른 반구에서는 다른 갈등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범선이 바하마(미국 동쪽 대서양 상 도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아메리카 온두라스 해변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인도로 향하는 동방의 항로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신대륙이었다.
복음전도인가? 정복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를 정복하고자 앞 다투어 군인을 보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그들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복음화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병사들은 원주민을 공격할 때마다 기독교 신앙을 요약한 요약문을 ‘스페인어’로 크게 낭독했다. 그래서 원주민이 복음의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학살했다. 그들은 원주민이 어차피 지옥에 갈 테니 조금 일찍 보낸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심지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설탕 농장의 노예
1500년대까지 꿀은 단 것을 좋아하는 유럽인의 기호식품이었다. 그러다 유럽인은 아메리카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설탕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 가지 문제만 극복하면 설탕 무역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란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불법이라는 점이었다.
스페인은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로 이 문제를 극복했다. 이는 원주민의 복음화를 명목으로 스페인 국왕이 식민지 지배자에게 원주민 통치를 위임하는 제도였다. 이로써 식민지 정착민은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노예 제도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참혹했다. 정착민이 기독교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원주민을 무제한 공급받아 노예보다 더 혹독하게 부려 먹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 원주민은 유럽인의 야만성을 이기고 살아남았지만, 그들로 말미암아 퍼진 질병만은 이기지 못했다. 유럽인의 잔혹한 행위와 그들이 옮긴 질병으로 멕시코에서는 원주민 1천800만 명 중에 1천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이 당황하고 낙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그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주민 노예가 없으면 막대한 이윤이 나는 농장을 경영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의 야만적 착취로 아메리카는 수 세기 동안 암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잡아들였다. 심지어 성경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변호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인을 창세기 9장 25절에 나오는 ‘가나안’과 연결했다.
노예들의 노예 페드로 클라버
페드로 클라버(Prdro Claver)는 성직자 안수를 받을 때, 노예를 돕겠다고 다짐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에 ‘언제나 아프리카인의 노예가 되는’이라는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1622년, 페드로는 예수회 선교사로 콜롬비아에 갔다. 그는 아프리카어를 하나도 몰랐으므로 수도사들에게 아프리카 노예를 사라고 부탁하는 한편 통역관들도 노예가 아니라 형제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사진설명> 노예시장에 팔려 온 아프리카 원주민.
페드로는 노예선이 해안으로 가까이 들어올 때마다 뛰어나가 맞았고 갑판으로 올라가 노예들에게 물을 주었다. 그는 아프리카인을 그들이 쓰는 언어에 따라 몇 그룹으로 나눈 다음, 각각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가르쳤다. 페드로는 노예에게 뱀의 허물을 보여주며 뱀이 허물을 벗듯이 침례를 받은 사람 역시 옛 생명을 벗고 새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예수회 선교구의 붕괴
페드로 클라버가 압제 받는 노예를 옹호한 유일한 예수회 선교사는 아니다. 파라과이에서는 예수회 성직자들이 잔혹한 노예제도와 질병을 이기고 살아남은 원주민을 위해 안식처를 지어주기도 했다. 예수회 선교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했다.
그러나 1628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농장주들이 예수회 선교구를 공격하여 선교사들이 보호하던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내륙 깊숙이 들어갔지만, 노예 사냥꾼들은 그들의 뒤를 추적했다.
1640년, 예수회는 선교구를 무장하는 한편, 원주민에게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도 좋다고 허락했다. 처음에는 이런 실험적 시도가 큰 효과를 보아 원주민 15만 명가량이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구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노예 소유주들의 탐욕과 월등한 무기를 당해내지 못했다. 1767년, 스페인 국왕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신대륙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1800년 무렵, 잔혹한 노예제도와 질병과 탐욕이 예수회 선교구를 완전히 휩쓸어버렸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