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37>] 청교도가 꿈꾼 종교국가는 물 건너가고

등록날짜 [ 2012-02-15 23:22:02 ]

정착 1세대 자녀 교화에 실패하며 사회 불안 가중
이성주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가다

청교도는 신대륙에 도착한 지 한 세대가 지나자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 문제란 부모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자녀를 크리스천으로 낳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1세대 정착민은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고백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 중 절반가량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식민지 시민 절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 과연 기독교 원칙에 따라 식민지 사회를 통치할 수 있을까?

청교도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놨다. 바로 ‘불완전 서약(Halfway Covenant)’이 그것이다. 전에는 목회자들이 크리스천 부모의 자녀에게만 침례를 베풀었으나 이제 교회와 2세대 자녀 간의 유대를 더욱 견고히 하려고 불신자 부모의 자녀에게도 침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녀의 수도 날로 감소했다. 이 점에 대해서 1세대 청교도는 대부분 어떤 사악한 존재가 식민지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다고 느꼈다.

세일럼의 마녀사냥
그런데 1692년 어느 날,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발생한 한 가지 사건으로 베일에 가려진 청교도의 은근한 두려움이 노골적인 광포함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12세 소녀가 마법을 쓴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그 소녀와 친구들은 다른 여자들도 마법을 썼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이에 1세대 청교도의 의로운 분노가 대중적 집단흥분 상태로 번졌다.


<사진설명> 세일럼 마녀사냥 재판

식민지 지도자들의 강압에 못 이긴 혐의자 50명이 마법을 썼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모두 방면됐으나 자백을 거부한 19명은 교수형에 처했다. 남자 한 명은 아내를 기소하는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세일럼의 마녀사냥’이라고 알려졌다. 물론 이 사건은 6개월 만에 끝났지만, 유럽에서는 이보다 더 오래, 더 잔혹한 방법으로, 더 자주 이런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나중에 이 재판에 참여했던 판사 한 명이 세일럼 재판은 “부끄러운 잘못이다”고 고백했다. 이 사건은 청교도에 영원한 오점을 남겼다.

마녀사냥 이후, 매사추세츠 베이에서는 영국 정부와 몇 차례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17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영적 무감각 상태가 초기 청교도의 열정적인 신앙을 잠식했다.

이성에 지배받는 종교
종교개혁 이전의 크리스천은 교회 전통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반면 16세기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일념으로 교회 전통 중 많은 부분을 무시했다. 그리고 1600년대와 1700년대에 이르러 세계를 이해하는 주된 수단으로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내적인 힘, 곧 이성이 교회 전통을 대체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이런 강조가 계몽주의(Enlightenment)라고 알려진 18세기 운동의 주된 특징이다. 계몽주의 이전의 사람들은 전통을 안내자로 삼았으나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미래에 관심을 집중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는 보이지 않는 영과 통제하기 어려운 운명이 지배하는 낡은 세계관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비전을 들여앉혔다. 그들은 우주가 어떤 ‘신적 창조자’에게서 영원불변의 자연법칙을 따르는 힘을 부여받았으며 스스로 지탱 가능한 기계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회의주의자가 바람처럼 나타나 “인간 이성이 자연의 내적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 성경이며 구원이며 신조 따위가 왜 필요한가?” 하고 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성과 자연만으로 모든 것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작이 탄생한다. 이신론(理神論, Deism) 혹은 자연신론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신론자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생각을 거부했다.

“이적? 불가능하다! 삼위일체? 터무니없다! 예수? 인간 메시아일 뿐이다! 하나님의 오묘함?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저 기독교 윤리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했고, 창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행한 의미 있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신론은 유럽 대륙에 급속히 확산했는데, 그 과정에 프리메이슨 형제단(Freemason Brotherhood)이 한몫했다.

1738년, 교황 클레멘트 12세는 이신론을 정죄하는 한편, 가톨릭 신자가 프리메이슨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이신론은 대중의 인기를 얻으며 계속 확산했고, 그 영향으로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신념)를 채택하는 교회도 적지 않았다.

이신론자는 1600년대 교회들이 편협한 종교관으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사례를 두고 “세상 모든 종교가 이신론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친다면, 종교 전쟁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해서 이신론이라는 잘못된 종교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종교관의 골격을 형성하게 됐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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