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38>] 18세기 초,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

등록날짜 [ 2012-02-21 09:49:59 ]

미국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영국은 존 웨슬리가 주도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을 이끌며 부흥의 불씨 지피다

미국 식민지 부흥운동- 노댐턴 각성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라는 18세짜리 미국 식민지 주민이 “결단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고 또 결단해야 한다. 남들이 그렇게 하든 그렇게 하지 않든 나는 할 것이다!” 하고 일기에 썼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딱딱하고 단조로운 음조로 메시지를 읽었고, 때로는 2시간 이상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노댐턴 조합교회 목회자로 5년이나 사역했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1734년, 매사추세츠 노댐턴의 시민이 그런 에드워즈의 메시지에 놀라운 반응을 보인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부흥의 섬광이 노댐턴 교회의 영적 암흑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성령께서는 교인 300명의 죄를 자각하게 하시고 죄를 자복하게 하셨다. 한때 머리로만 믿던 것들이 그들의 가슴에 깊이 꽂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 마을에는 사랑이나 기쁨이 없었다. 죄의 자각에서 오는 영혼의 고뇌만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부흥의 첫 번째 물결은 단 3년간 지속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노댐턴의 부흥은 ‘대각성’이라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 부흥운동- 경건주의
1600년대 후반, 유럽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와 비교해서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경건주의(Pietism)’라고 알려진 유럽인의 운동을 사용하셔서 전 세계에 반향을 불러올 영적 각성을 일으키셨다. 경건주의는 야콥 스패너(Jacob Spener)가 저술한 『경건한 욕구(Pious Desires)』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시작했다. 그 책은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추구할 것을 크리스천에게 촉구했다.

그런데 유럽의 이 경건주의가 미국 대각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친 것일까? 1736년, 영국 국교회 성직자 한 사람이 미국 원주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조지아 식민지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서 승객이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일단의 모라비아 경건주의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화롭게 앉아 시편으로 찬양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 성직자는 무척 놀랐다. 나중에 그는 “나는 한평생 그렇게 영광스러운 날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다.

모라비아 교도 한 사람이 존에게 “주님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존은 “그분이 세상의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라비아 교도가 “그렇다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도 아십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존은 더듬거리며 “그분께서 저를 구원하셨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존은 “저는 미국 원주민을 회개케 하려고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누가 회개케 한단 말입니까?” 하고 흐느꼈다. 존 웨슬리는 2년 동안 미국 식민지에서 열매 없이 사역하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존 웨슬리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 수잔나는 집에서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를 자주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수잔나는 “어느 주일 200명가량이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방이 모자라 대부분 돌아갔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존과 그의 동생 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1738년, 그러니까 존 웨슬리가 조지아 식민지에서 열매 없이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2년 뒤, 찰스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다. 사흘 후, 형 존 웨슬리가 런던 알더스게이트 거리를 방문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열심히 경청했다.

나중에 존은 “8시 45분경,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분이 내 죄를 깨끗게 하셨고 나를 구원하셨음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슴앓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각성이었다. 그것은 회개였다.

존과 찰스 형제는 영국 교회 내에 경건주의 모임을 이미 조직하여 ‘신성 클럽(Holy Club)’이라고 명명한 바 있었다. 존은 신성 클럽 일원에게 집중적인 성경 묵상과 금식과 주의 만찬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존의 질서정연한 방법론으로 그들을 ‘메소디스트(Methodist, 단어 자체는 ‘경건의 방법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후에 ‘감리교도’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라고 지칭했으며, 그 이름이 늘 그들을 따라다녔다.


<사진설명>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

존이 런던 거리에서 회개를 체험한 후, 그의 추종자 사이에서는 옥외 설교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활동한 설교자 중 사라 크로스비(Sarah Crosby)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20년 동안 영국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건강이 쇠약해져서 더는 여행할 수 없게 되자 여성 복음전도자들의 친교 모임인 ‘여성 형제단’을 조직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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