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성경 속 문화를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

등록날짜 [ 2012-02-21 09:55:36 ]

한국적 사상으로 읽으면 자칫 오해할 소지 많아
당시 정서나 상황 이해하고 읽으면 큰 도움 돼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시대사상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히브리 사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시대사상으로 읽어야 제대로 성경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에 예수께서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실 때, 여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하고 말씀하셨다.

한국인 사상으로 볼 때, 과거에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닌 이 여자를 창녀(娼女)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히브리인 사상은 한국적 정서나 사상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 여인은 시집가서 그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 채로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을 통해서라도 죽은 남편의 대를 이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야말로 그 시대 여인에게는 최고의 사명이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비할 섭리를 지닌 유대 민족에게는 꼭 필요한 풍속이었을 것이다.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다말이라는 여자에게 장가가서 자식이 없이 죽자, 유다는 둘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어 큰아들의 대를 잇게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죽자 셋째아들을 다말에게 주기를 두려워한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낸 후 셋째가 장성하였여도 부르지 않았다. 다말은 상처(喪妻)한 시아버지 유다가 객지에 갔을 때에 창녀 복장으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통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베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족보 반열에 오른 다윗 왕 9대 조상이다.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이 일은 한국 민족의 정서와 사상으로는 반인륜적 사건이다. 하지만 히브리인 사상으로 볼 때는 시집간 가문의 자손을 낳는 사명을 다하려 몸부림친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정숙하다고 칭송받을 여인이요, 그 가문의 명예를 빛낸 귀중한 여인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수가 성 우물가 이 여인도 창녀(娼女)가 아니라, 다말과 같이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남편의 사후에 계속 그다음 시동생들을 남편으로 맞아 기어이 여인의 사명을 다하려 한 정숙한 여인이요, 가문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몸부림친 여인임을 알 수 있다.

한국적 정서와 사상에서 빗어진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를 또 한 가지 들어보자.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었다”고 말한다. 한국적 사상으로는 부생모육(父生母育)이라 하여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형상의 모양’인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고 기록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모양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삶의 법칙이 올바로 정해진다.

이같이 성경을 읽을 때 그 시대사상을 바탕으로 읽지 아니하고 각자 자신들의 민족적 정서와 사상을 바탕으로 읽으면 성경을 기록한 본래 뜻과는 현격한 차이가 생겨 이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 자기 나라 사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만, 그 시대와 문화를 이해하며 읽는다면 절대로 성경을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는 히브리 사상을 지니고 사는 민족이 있고, 헬라 사상을 지니고 사는 민족이 있다. 히브리 사상은 “왜 예수 믿어?”라는 결론을 말하지만, 헬라 사상은 “어떻게 예수 믿어?”라는 방법을 말한다. 어떤 질문이 옳은 질문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왜?’라는 질문에는 영적인 문제가 나오고,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학문적, 문화적, 인간 중심적, 인본주의적인 문제가 나온다. 이만큼 ‘왜’라는 말과 ‘어떻게’라는 말은 상당한 결과적 차이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 벌써 내 영혼의 문제, 하나님과 관계 문제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적인 문제를 다룰 때는 바로 문화가 나오고 학문이 나온다. 그래서 히브리적 사상에서는 하나님과 나와 영적인 문제가 나올 때는 반드시 진리(眞理)가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헬라적 사상에서 ‘어떻게’라는 인간 중심적인 문제가 나올 때는 순리(順理)가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순리(順理)를 믿는 것이 아니고 진리(眞理)를 믿는다.

이만큼 어떤 사상을 갖고 성경을 읽는가는 순리(順理)와 진리(眞理),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방법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 등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민족적 정서와 사상을 그대로 지니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되며,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상의 안목으로 성경을 읽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윤석전 목사 강의 ‘무보수전도자학교’ 중 일부 내용 발췌하여 정리.

위 글은 교회신문 <27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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