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2-28 13:07:26 ]
휫필드와 대각성 운동, 수많은 식민지 정착민이 예수를 영접
기독교 사상이 배경 된 독립전쟁과 정교분리의 신생국 탄생
조지 휫필드
메소디스트(Methodist, 감리교인) 설교자 중에 가장 인기가 높은 사람은 등록금을 벌려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사환으로 일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였다. 찰스 웨슬리가 복음을 위해 일할 일꾼을 모집했을 때만 해도 사팔뜨기인 이 젊은 사환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설교자가 된 조지 휫필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가 식민지 전체를 돌아다니며 긴 설교 여행을 끝마쳤을 무렵, 미국 식민지 정착민 80퍼센트가 그의 설교를 들었고, 식민지 정착민 수천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그의 간절한 호소에 적극 반응했다.
<사진설명> 식민지 부흥운동에 앞장 선 조지 휫필드.
휫필드가 노댐턴에서 말씀을 증거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휫필드의 메시지가 일으킨 반향이 매우 경이로운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 칭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예정 교리에 관한 견해 차이로 몇 년 동안 서로 갈라져 있었다. 휫필드는 칼뱅주의자였지만 웨슬리 형제의 신학은 칼뱅주의보다 알미니안주의에 더 가까웠다. 1749년,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서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투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에 관해 시인 찰스 웨슬리는 “오라! 나의 휫필드여! 처음의 벗이 마지막 벗이 아닌가!” 하고 노래하며 탄식했다.
안타깝게도,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와 달리 노예제도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노예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휫필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인 시인 필리스 휫틀리는 “그는 수많은 군중에게 허물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프리카인이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분은 그대들을 간절히 열망하신다. 그분에게 꼭 들어맞는 호칭은 바로 공평한 구세주이시다!’ 하고 외쳤기 때문이다” 하고 회상했다.
식민지 부흥운동은 1750년 후반까지 지속하였고, 개척지와 하층민 사이에서 침례교와 감리교가 꽃피었지만, 식민지가 독립 투쟁을 전개하자 교회는 또다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치혁명, 독립전쟁의 지지와 반대
식민지 미국의 독립전쟁(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 왕실에서 독립을 쟁취하려고 벌인 전쟁)의 모든 국면에는 기독교 사상이 깊이 배어 있었다.
존 웨슬리는 식민지 미국의 독립전쟁에 거세게 반대했다. 그는 식민지 미국의 독립보다 노예제 철폐가 더 시급한 과제임을 역설하며 “나는 국회 대표권도 없고 무거운 세금을 물고 있지만 노예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노예인가? 고역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보라. 당신과 나와 보통 영국인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자유다. 그러나 아프리카 흑인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노예제도다”라고 말했다.
영국 국교회, 재침례파, 퀘이커교도 등도 독립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소위 말하는 애국자들이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미국인을 가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재산을 몰수당했고 혹자는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식민지 교회 교인은 대부분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많은 미국인 목회자가 교회 부흥보다는 독립전쟁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성경에 언급한 이스라엘 전쟁을 가리켜 영국과 벌이는 싸움에 필요한 ‘소명’이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미국의 대의(大義)가 곧 그리스도의 대의다”라고 공언했다.
수많은 목회자가 강단에서 애국심을 부르짖었는데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기독교가 아닌 이신론을 믿고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예수의 이적을 “천박한 무지와 날조”라고 일축했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나는 예수의 신성이 의심스럽다. 그런 데에 시간을 빼앗길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독립선언문조차 이신론자들이 즐겨 쓰는 ‘자연의 하나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신론자와 크리스천 모두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생국 미국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틀을 만들 때, 제3조에서 “의회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발현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로저 윌리엄스의 꿈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어떤 종교와도 연결하지 않는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79호> 기사입니다.